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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14. 2020

마감과 마감

마감하는 주에 마감하듯 올린다

마감 중에는 대충 이런 기분이다. 내 방은 전망이 덜 좋고 나는 저 소년보단 덜 귀엽게 생겼지만.



지금은 월간지 마감 기간이다. 나도 이번 주에 월간지 마감에 맞춰서 원고를 하나 보냈고, 편집자의 의견 반영해 몇 가지를 고쳐서 송고 절차를 마무리했다.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원고가 하나, 이번주 안에 끝내야 할 원고가 하나 더 있다.


한창 원고를 만들어 보낼 때는 주변 모든 게 다 엉망이다. 바로바로 정리하면 좋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어야 말이지. 책상 위에는 홍차 색소가 말라붙은 머그컵이 있다. 쓸모 있는 메모와 이제 쓸모 없는 기록만 남은 메모들이 책상 위에 쌓였는데 그걸 분류해서 버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마음만 더 어지러워진다. 컴퓨터 바탕화면과 인터넷 브라우저 탭은 그것보다 더 지저분하다. 작업 중인 문서 파일들, 참고로 받은 그림 파일들, 참고 자료로 띄워둔 온갖 나라의 기사와 게시물과 사진들. 전통시장 한복판에 주방을 설치해 7첩 반상을 차리듯 정신없는 기분으로 어떻게든 뭔가를 해 나간다. 많은 월간지 에디터분들이 그런 기분일 거라 추측한다. 나처럼 너저분하게 일하는 분들이 또 있지는 않으면 좋겠지만.


월간지에서 풀타임 에디터로 일할 때는 모든 일정이 월간지 마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무조건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들어가는 마감 주간이다. 마감 즈음에는 늘 새벽 시간쯤 늦게 자고, 그렇게 자고 나면 몇 시간을 자도 머리 안에 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일어나 깬 듯 깨지 않은 듯한 정신으로 마감 무렵의 사무실에 간다. 평일이 평일 같지 않고 휴일이 휴일 같지 않은 기분으로 겨우 마감을 하고, 그날 12시간쯤 자고 다음날 일어나면 그때를 기점으로 다시 상쾌하게 한 달을 시작하고, 그렇게 10여 년을 보냈다.


월간지를 나와 보니 월간지 밖 세상에는 더 많은 마감이 있었다. 월간지만 마감이 필요할 리 없다. 모든 조직과 프로젝트에는 각자의 마감 기한이 있다. 지금 내 일 역시 월간지 원고 뿐이 아니고, 내 손님과 클라이언트와 파트너도 조금 더 많아졌다. 그 말인즉슨 각자의 사정에 따라 각자의 마감 일정이 다르다는 뜻이다. 예를 든다면 매월 1일이 마감인 곳도, 미팅한 날짜를 기준 삼았을 때 7주 후가 마감인 프로젝트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러다 보니 나도 이제 월마감 타이머에 맞춰 살 수 없게 됐다. 월간지를 그만둔다는 건 낮과 밤과 평일과 휴일이 뒤엉킨 삶에서 벗어난다는 걸 뜻한다는 걸, 월간지를 그만두고 알았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지금 내게는 이런저런 일이 있다. 그 일을 진행하는 각 단체와 담당자도 다양하다. 그 모든 분들은 사정과 성격과 상황이 다르고, 그 말인즉슨 모두 각자의 마감일과 업무 사정이 다르다는 뜻이다. 월간지의 시간 개념에서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렇게 일상이 변한 이유는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일을 거르거나 대충 할 생각이 없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걸 만들고 싶 싶다. 나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를 골라 나와 일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응당 해야 할 도리다. 마음이 변해서 일상이 변했으니 몸도 그에 맞춰서 더 건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평생 안 하던 운동도 종종 한다. 청소년 때 뛰기도 귀찮아서 100m도 20초에 들어왔는데 말이지. 담배는 5년 전쯤부터 안 피우고 술은 원체 많이 안 마신다. 내게 들어오거나 내가 진행하는 일들은 점점 재미있어지는 반면 내 생활 자체는 점점 밋밋해지고 있다.


마음을 바꿨다고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일하는 분들이라면 비슷할 텐데, 한 번에 여러 일이 불가피하게 몰리거나 내 마음처럼 되지 않곤 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일들과 마감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타이어도 터지고 기어도 나가고 전조등도 고장난 자동차처럼, 내 일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곤란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몸도 피곤하고, 압박감도 느끼고, 여러 관계자 사이에 끼어서 조금 난처해지기도 한다. 특히 내 쪽 일은 거절할 때도 거절당할 때도 많고, 늘 생각지 못한 이유로 생각지 못한 어려움에 마주친다.  


에디터 일이라거나 글 쓰는 일이라고 하면 어여쁜 일만 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직업 에디터로 일한 덕에 보고 겪은 좋은 일들도 물론 많았다. 다만 이쪽 일도 그렇게 어여쁘게 흘러가지만은 않죠.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압박은 일의 일부, 스트레스는 어떻게든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압력솥 속의 쌀도 압력과 열을 받아야 밥이 된다.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는 이상한 일이라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걸 깨닫게 됐다. 지금 내 문제는 압박과 스트레스 상황이 오는 게 아니라 그 압박과 스트레스가 끝날 때까지 내가 견딜 수 있느냐다. 재미있는 일은 과정도 결과도 재미있으니까.


몇 년 전에는 압박감이 심해져 견딜 수 없을 때 뭔가를 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 차리고 보니 택배 상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어떤 신발은 색만 다른 게 5개씩 있다. 이 버릇을 잘 못 고치는 것 같아서, 요즘은 스트레스가 올 듯한 기분을 느끼면 바로 생필품을 산다. 며칠 전에도 생수 80통과 면도 크림을 주문했다.


그러다 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마감이 끝나 있다. 원고도 보내고, 자료도 보내고, 이 마감도 끝나고 저 마감도 어떻게든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 있다. 그러면 태풍이 지나고 맑은 날씨가 찾아온 어촌 마을에 사는 작은 통통배 어선 선장이 안도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는 동안에도 메일함과 메신저에는 다음 달 원고와 다음 일 일정들이 들어오지만, 그야말로 좋은 일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니까.


무엇보다 마감 특유의 쾌감이 있다. 마감 일자와 상황에 맞춰 뭔가 다 해냈을 때 분명히 느껴지는 성취감 비슷한 쾌감이. 스스로 깨기로 다짐했던 달리기 기록을 깬 듯한 기분, 혹은 스스로에게 약속한 운동 횟수를 채운 듯한 기분과 비슷하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번 아주 좋은 느낌을 느끼면 그 느낌을 한번 더 느끼려고 전에 했던 일을 또 하게 되는 것 같다.


일과 마감 사이에서 그렇게 아주 좋은 느낌을 받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좋다. 취미에서 느끼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일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마감이 끝났을 때의 쾌감도 그런 느낌이다. 마감을 잘 마쳤을 때의 쾌감은 마감 중의 고통보다 훨씬 크다. 고통보다 쾌감이 크니까 이 일을 계속하고 있겠지. 자 그럼 이제 남은 일 조금만 더 하러 가기…전에 조금만 쉬어야겠다. 밤이니까.




+각종 사연이나 질문에도 늘 열려 있습니다. iaminseoul@gmail.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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