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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an 01. 2021

극장의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상관이 없으면서 있는 것 같기도 한 일들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는 올해가 81회째. 올해는 관중 없이 90개국 이상으로 생중계됐다. 한국에서도 KBS 클래식 FM을 통해 생중계된 걸로 안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던 때가 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안 좋은 게 내 몸에 다 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은 연말과 연초가 될 때 더 커졌다. 열두 번 월간지 마감을 하면 한 해가 끝나버렸다. 세상이 멈추는 연말에 내게 남은 건 열두 권의 잡지 속에 남은 내 이름과 다음 달의 일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연말 연초니까 만날 사람도 없었다. 추운 날씨에 매일 뜨는 해 같은 걸 보겠다고 굳이 더 춥고 높은 어딘가까지 가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별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긍정적인 척하는 거지.  


그러다 1월 1일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극장에서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걸 극장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어 예매 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웬걸, 표값이 4만원인데 거의 모든 자리가 만석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았다. 나는 클래식 문외한인데 세상 어딘가에는 빈 필 신년음악회 라이브를 보겠다고 4만원짜리 표값을 내고 영상을 보러 가는 사람이 있구나. 군데군데 한 자리씩 빈 곳이 있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할 일도 없었으니까 예매를 해 보았다. 


가서는 한번 더 놀랐다. 정말 음악회에 온 것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연초의 극장에 모여 있었다. 우중충하던 나와 달리 그 사람들에게는 새해의 기운같은 게 있었다. 한 해가 잘 갔다는 안도, 새해에 좋은 음악을 듣는다는 설레임, 이런 날에 클래식 음악같은 걸 들으러 오는 사람들 특유의 안정적인 느낌. 모두 그때 내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 후 매년 극장에 갔다.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를 봤다. 그거라도 해야 한 해를 조금이라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래식을 잘 모르니까 대부분 졸다 나왔다. 상관없었다. 좋은 사운드시스템이 내는 사운드 사이에서 자다 깨는 것도 그것대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끼리끼리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매년 혼자였다.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때의 나는 뭔가 좋은 게 필요했다. 세상 어딘가에 세계 최고 수준의 뭔가가 모여서 한 해를 축하하는 고리타분한 이벤트가 있다. 그 사실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와 내 주변의 뭔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수와 실패가 더 많았지만 나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성취라는 걸 깨달았다. 상황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변했다. 



음악회를 보러 가서 조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올해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를 보러 갈까 하던 차에 코비드-19가 터졌다. 극장 문이 9시에 닫는데 이건 8시부터 10시까지 한다. 라이브로는 볼 수 없다. 


유튜브에 방송 화면을 틀어둔 네덜란드인 덕에 올해 라이브를 본다. 올해의 지휘자는 히카르도 무티다. 지휘자 뒤로 보이는 관객석에는 관중이 한 명도 없다. 코비드-19 시대의 유럽인들이 한 해를 맞이하는 방식이다. 


2020년은 모두에게 할 말이 많았던 해였을 것이다. 좋은 소식은 2020년이 지났다는 것, 덜 좋은 소식은 2021년에도 뭔가 확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2차 세계 대전이나 9.11이 그랬듯 세계의 어떤 부분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뮤직 홀이 텅 빈 채로 공연하는 건 우리에게 무척 이상한 일입니다." 히카르도 무티가 마이크를 잡고 조금 전에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여기에서 공연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위대한 지휘자들의 영혼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기쁨, 희망, 평화, 형제애를 전합니다. 음악은 우리에게 직업일 뿐 아니라 임무이기도 합니다. 무슨 임무냐고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티는 이탈리아 억양이 가득 들어 있는 간결한 영어로 말했다. 건강이 중요하고, 음악은 정신의 건강에 도움을 주며, 이어질 음악으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고루 전할 거라고 말한 후 무티 씨는 이탈리아어로 마무리했다. "그라치에." 


내게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는 관객석의 아시아인 구경하기였다. 앞자리에는 키모노를 입은 일본 할머니들이 매년 보였다. 반기문이 와서 몇 번씩 클로즈업으로 잡힌 적도 있었다. 작년인가 제작년에는 한복을 입고 오신 분도 보았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기 가 봐야지. 형편이 좋아져서 빈에 양복을 싸들고 갈 정도가 되면, 콘서트의 말석에라도 앉아 한 해를 시작해야지. 매년 마지막 곡인 라데츠키 행진곡이 나올 때 나도 저 자리에 앉아서 짝 짝 박수를 쳐야지. 뭐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 생각한다. 


2021년의 공개 가능한 목표는 더 긍정적인 척하는 사람 되기다. 척이라도 하다 보면 뭔가 다른 게 되어 있기도 하더라구. 비공식 목표도 있는데 그건 비공식이라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 


모두 더 나아지고 덜 슬퍼지는 2021년 보내셨으면 좋겠다.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는 올해도 극장에서 한다. 내일 오후 2시에 메가박스에서 틀어준다고 한다. 어디 한번 보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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