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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pr 03. 2021

백팩과 스웨트셔츠에 대한 생각

요즘 물건은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나

나이가 들다 보니 샀던 걸 계속 사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똑같은 거 아니야?"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나만 아는 차이가 있는 비슷한 물건들이 계속 쌓여만 갔다. 똑같아 보이는 백팩, 똑같아 보이는 청바지와 치노 바지, 색만 다른 운동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물건을 이야기한다면 나름 쇼핑 정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원고에서 제안 받은 주제는 '시작'이다. 시작이라…<고등래퍼> 경연에 나간 기분으로 키워드를 생각하다 백팩을 떠올렸다. 이 원고를 읽을 여러분들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새학기가 되면 가방 하나쯤 사고 싶지 않을까? 아닐까? '과거는 다른 나라다'라는 말이 있다. 나도 그 말처럼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다. 젊은이들도 내 나이를 도통 이해하지 못할 테니 오히려 아저씨의 말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가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백팩

어떤 백팩이 좋을까 하면서 29cm을 뒤적이다 보니 세상에 물건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나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높은 가격 순으로 정렬을 해 보았다. 쟁쟁한 명품 브랜드들이 나왔다. 나는 현대 사회의 럭셔리 브랜드의 브랜딩 기술을 존경하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하나도 사고 싶지 않다. 2페이지, 3페이지로 넘기다 드디어 눈과 손이 멈췄다. 낯익은 브랜드가 나왔다. 그레고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레고리에 이상한 동경이 있었다. 스무 살쯤이었나, 주변의 멋있는 아이들이 처음 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노스페이스에 비하면 날렵해 보였고 기능적이면서도 묘하게 옛날 느낌이 들었다. 그레고리였다. 그레고리는 도도한 옆 동네 형이나 누나들 같았다. 노스페이스 가방에 비해 두 배쯤 비싼데다 매장도 압구정 로데오(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실로 대단한 동네였다) 한복판에 있었고 세일은 전혀 없었다. 


세상 영원한 게 없다. 강남에서 잡지사를 다니던 무렵 압구정 그레고리가 폐업 세일에 들어갔다. 70~80% 정도의 초대형 세일이었다. 어릴 때의 동경을 원료 삼아 몇 번씩 매장에 갔다. 인기 좋은 검은색같은 건 다 팔려버렸고, 수요가 별로 없는 화려한 미국풍 색깔 가방들만 남아 있었다. 도리어 점원은 "이건 지금은 나오지 않는 메이드 인 USA다"라고 강조하셨다. 좋다고 샀다. 세일 가격으로 샀지만 어릴 때 갖고 싶던 걸 가졌다는 생각에 설렜던 기억이 난다. 


사서 써보니 두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첫째. 공간 구성에 대한 배려가 전무했다. 40L쯤 되는 등산 가방인데 별도의 칸막이나 주머니가 하나도 없었다. 요즘 가방이라면 1만원짜리 아마존 베이직 백팩에도 있는 노트북 슬리브가 없는 건 기본, 앞주머니도 없었다. 별도의 주머니를 원한다면 가방 고리에 장착되는 별도의 전용 파우치를 사야 했다. 이게 뭔가 싶은 생각으로 매장에 한번 더 가서 파우치를 샀다. 


둘째. 반면 착용감 면에서는 굉장히 견고했다. 튼튼하면서도 가볍고, 편안한 동시에 날렵했다. 어깨끈 부분의 설계가 잘 되었다는 걸 메자 마자 느낄 수 있었다. 가방 가득 무거운 물건을 담고 가방을 메도 끈 길이를 잘 맞추면 장수풍뎅이의 날개처럼 등에 쏙 달라붙었다. 끈과 몸체 등의 내구성도 훌륭해서 외국에 나갈 때도 몇 번씩 들고 갔다. 냉정히 말해 일상용 책가방의 영역에서는 오버스펙이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이런 표현 송구하오나) 남자는 경기도 캠핑장에 갈 때도 세렝게티 수준의 장비를 챙겨 나가고 싶어하는 족속들이다. 나도 그렇다. 장단점의 극명한 온도차를 느끼며 나의 그레고리를 잘 써왔다. 


그때의 기억 속 그레고리가 아직도 29cm처럼 세련된 젊은이들의 쇼핑몰에 있다니 반가웠다. 물건을 받아보니 내가 좋아하던 그레고리의 모습들도 그대로였다. 도시형이라기엔 지나치게 견고하고 기능적인 어깨 끈. 아무거나 매달 수 있는 다양한 스트랩과 고리들. '너무 큰 거 아닌가' 싶은 지퍼, 역시 '너무 긴 거 아닌가' 싶은 가죽 손잡이까지. 


그레고리의 디테일.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변한 것도 있었다. 로고가 변했다. 전 세계의 로고계는 복잡한 곡선이 사라지고 직선으로 단순화되는 분위기인데, 그레고리의 로고 역시 이미 몇 년 전 직선화했다. 로고를 단순하게 만들면 단가가 떨어지는 걸까. 그때 그 그레고리 압구정 직원의 말씀처럼 생산국도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변했다. 나일론 원단도 조금 얇아졌다. 20세기부터 만들어진 물건들은 21세기로 넘어오며 미묘하게 디테일이 선명해지고 양감이나 무게가 줄어드는데, 그레고리 가방에서도 그 경향이 보였다. 늘 똑같아 보이는 그레고리 가방도 세상 변화를 부지런히 받아들였구나 싶어 조금 짠해졌다. 작은 일에 짠해지는 게 나이 드는 증거 중 하나다. 


포장을 슥슥 뜯고 아무 거나 몇 가지 넣어서 며칠 메고 다녀 보았다. 써보니 착용감은 여전히 그레고리였다. 내 기억 속 장점들이 그대로였다. 어깨끈은 여전히 부드럽고 폭신하며 튼튼했다. 그레고리 가방은 비슷한 느낌의 노스페이스보다 몇 만원 더 비싼데, 써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내구연한 역시 훨씬 길 것이다. 


내가 옛날 그레고리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보완되었다. 노트북 슬리브가 설치되고(굉장히 감동했다) 앞부분에 보조 주머니가 생긴데다 가방 속 메쉬 이너 포켓도 있었다. 일본의 포터처럼 공간 구획이 굉장히 촘촘한 가방도 있으나 난 그건 좀 부담스럽다. 그레고리 정도의 공간 구획이면 충분하다. 하나 더, 이 가방은 일본의 빔스와 협업한 별주 컬러 모델이다. 그레고리의 로고 색이 다르고 가방 안에 작은 택이 하나 붙어 있다. 나같은 아저씨들에게는 이 정도만 달라도 충분하다. 



스웨트셔츠

스웨트셔츠도 책가방처럼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사온 옷이다. 스웨트셔츠처럼 구매 핑계를 대기 쉬운 옷도 없다. 어떤 건 면 100%인데 세일을 해서, 어떤 건 여행지의 기념품이라서, 어떤 건 일본이나 북미 어딘가에서 오래된 기계로 정성들여 만들어서, 어떤 건 지금은 보기 힘든 챔피언 리버스 위브라 토쿄에서는 10만원일텐데 LA에서는 1만원이라서, 어떤 건 암홀이 커서, 어떤 건 암홀이 작아서, 어떤 건 새거라 마음에 들고 어떤 건 빛이 바랜 정도가 마음에 들어서...스웨트셔츠를 계속 사대는 이유에 대해서만 삼십 분쯤은 이야기할 수 있다. 


하도 많이 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스웨트셔츠의 종류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소재는 면 100% 아니면 그에 가까운 것. 면 50% 폴리 50%같은 건 웬만하면 사지 않는다. 빈티지 여부, 얼마나 낡았는지 혹은 지저분한 게 묻었는지는 상관없다. 오히려 미국 생산 챔피언 빈티지같은 건 걸레처럼 낡아도 산 적이 있다. 면 50%이나 폴리 50%라도 로고나 프린팅이 웃기면 사곤 한다. 적다 보니 이것저것 다 사댔구나 싶어서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옷장을 반쯤 채운 스웨트셔츠 중 자주 입게 되는 건 따로 있다. 면 100% 혹은 그에 준하는 것. 두께감이 조금 두껍다 싶은 것. 얇은 건 미역처럼 흐늘흐늘해서 잘 안 산다. 그리고 너무 고급스럽지 않은 것. 스웨트셔츠 중에는 일본, 미국, 독일, 캐나다 등에서 옛날 리버스 위브 기계로 만든 100% 면직물이 있다. 실제로 보면 원단 조직의 모양과 촉감부터 다른 고급품이다. 왠지 이런 건 또 손이 잘 안 간다. 가격과 품질이 아니라 마음과 성향의 문제다. 줄 서서 먹는 최고급 삼겹살집이 맛있는 걸 알면서도 안 가는 이유와 비슷하다. 스웨트셔츠는 어디까지나 편하고 뜨끈뜨끈한 옷이었으면 싶다. 그래서 핏도 옛날 모양이었으면 하고. 암홀이 크고 팔 길이가 길었으면 싶고. 내게 스웨트셔츠는 뭔가 그렇게 느슨한 느낌으로 입는 옷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으로 29cm의 스웨트셔츠를 하염없이 찾아보다 네이더스에서 멈췄다. 이 스웨트셔츠는 내가 원하는 100% 의 스웨트셔츠와 조금 달랐다. 암홀은 너무 크지 않게 적당하고 팔꿈치에 원치 않는 스티치 디테일이 있으며 가슴팍의 로고는 웃기다기보다는 멋있는 느낌이었다. 그랬는데도 이 스웨트셔츠에 끌렸다. 밑도끝도없이 맥락 없는 문구 프린트가 인쇄되어 있지 않아서 좋았고, 면 100%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미국산 원단이라고 표기해둔 게 눈에 띄었다. 외제 원단이라서 좋다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신경 썼다'는 고집과 디테일이 느껴졌다. 


네이더스의 디테일들. 


받아서 며칠 입어보니 역시 요즘 옷이었다. 모든 게 짱짱한 새 옷 특유의 느낌이 새삼 반가웠다. 적당히 물빠진 검은 색도 신경을 쓰신 의사 결정이었을 것이다. 암홀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봄 재킷 안에 입을 때 더 편할 것 같았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비슷한 곡을 끝없이 재해석하는 것처럼, 현대의 디자이너와 브랜드도 클래식 아이템을 열심히 해석하고 계심을 실감했다. 팔꿈치의 스티치 디테일은 젊은 척하는 아저씨처럼 보일 듯해 조금 면구스러웠으나 그거야 이 옷을 고른 내 문제다.


네이더스 스웨트셔츠의 비닐 백.

네이더스의 스웨트셔츠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옷을 담은 비닐 백이었다. 보통 옷을 사면 비닐 포장에 테잎 하나 붙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옷은 별도로 제작한 푸른 지퍼백 안에 담겨 왔다. 이 푸른 지퍼백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지퍼 백 쓰기, 푸른 색 넣기, 이런 건 다 제품의 단가고 회의를 한번이라도 더 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옷에는 요즘 물건에서 보기 힘든 세세한 성의가 있다.


요즘은 눈에 띄는 것만 신경 쓰고 눈에 안 띄는 걸 신경 안 쓰는 풍조가 심해지고 있다. 사진으로는 그럴싸하고 받아보면 '애걔걔' 싶은 물건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그게 트렌드라면 나도 거기 맞춰야 할까...라는 고민을 종종 한다. 더 화끈한 인플루언서 같은 게 되어 더 눈에 띄어야 하나 싶고. 나만 이럴 리 없다. 남 보는 뭔가를 만들어 팔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고민 앞에 놓이지 않을까. 그래서 네이더스의 비닐 백이 마음에 남았다. 이런 시대에서도 아직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구나, 시대가 원하는 것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계시는구나 싶어서. 



적다 보니 너무 나갔나 싶다. 의미부여가 과했나? 어쩔 수 없다. 과한 의미 부여 역시 나이듦의 증거다. 이번 달 아저씨의 의미 부여는 여기까지다. 다음 달의 또다른 의미부여에서 만나요. "





온라인 셀렉트 숍 29cm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총 5회차이고, 오늘 올라간 게 첫 원고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그간 격조했네요. 빈 집처럼 블로그를 비워두고 있었습니다. 온라인 페이지 관리 잘 하시는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그간의 작업들 쭉쭉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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