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국물들
"손님 여러분, 이 비행기는 약 50분 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지금 서울의 날씨는 몇 도, 습도는…" 이라는 말이 들릴 때의 마음을 기억한다. 1주짜리 해외 출장이든 2개월짜리 연수든 귀국 직전에 한국 음식이 가장 먹고 싶다. 그때 가장 간절한 음식, 인천공항에 내려서 짐을 받자마자 먹으러 가게 되는 음식은 뭘까. 해외 출장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인천공항역 지하 1층에 있는 봉피양에 간다. 냉면이든 갈비탕이든, 그곳에는 국물이 있다.
해외를 다니다 보면 한식의 각종 요소는 다른 아시아 음식으로 얼추 대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쌀이라면 중국, 태국, 일본 음식점에 가면 된다. 인도 카레집의 가장 매운 카레는 엽기떡볶이만큼 맵다. 국물만은 대체가 되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떠먹도록 설계된 서양의 스프는 한국인의 입맛에 조금 옅다. 면발의 소스로 설계된 중식이나 일식의 국물은 너무 짜거나 진하다.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결국에는 그릇째 들어서 끝까지 마시고 나서 '아 잘 먹었다' 싶은 미소를 지으려면 한국의 국물이어야 한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니 내게는 서울 역시 국물의 도시다. 누군가는 다른 서울의 맛 같은 걸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값나가 보이는 한식이나, 서울식 파인 다이닝이나, 서울에서 즐길 수 있는 세계의 다양한 음식 같은 것들. 나는 다 관심 없다. 한국은 아직 고급 문화의 수준이 높지 않고 해외 문화 재현 완성도에도 한계가 있다. 누군가 내게 서울의 맛을 물을 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결국 국물이다.
국물이 엄밀한 의미의 고급 음식은 아니다. 고급 음식이 될수록 식재료 자체의 맛을 최대한 변형 없이 살려 접시 위에 올린다. 날것을 다듬거나 살짝 데치거나, 곱게 찌거나 적당히 굽는다. 이런 것이 고급 음식이다. 튀기거나, 푹 삶거나, 국물을 우려낸 음식은 값싼 식재료의 단점을 최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조리법이다. 맛과 품질을 떠나 사치품이라 할 수는 없다. 한국이 빈국이었던 기억이 서울의 국물 음식에 남아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식자재 원가 면에서 국물이 효율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치와 품질이 늘 비례하지는 않는다. 국물 역시 마냥 간단하고 값싼 음식이 아니다. 음식에 들어가는 자원과 노력의 투입 양으로 보면 국물 요리는 재료비가 저렴한 대신 인건비가 계속 필요하다. 좋은 국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 거품을 걷어내는 정성이나 순서대로 육수 재료를 넣는 등의 비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인 다이닝이 공예라면 국물은 규모의 경제다. 많이 끓일 수록 진하고 효율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식당 역시 국물이 뛰어난 식당이다 앞서 말한 이유로 나는 서울의 파인 다이닝과 값비싼 고기집과 깊이 있는 척하지만 와인 리스트만 봐도 얄팍한 티가 나는 고가 식당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반면 국물 음식에는 이 도시에서 발을 딛고 하루하루 견디고 국물을 마시며 살아온 사람들의 리얼리티가 있다. 내게는 그 리얼리티야말로 서울의 특산물이고,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국물에도 종류가 많다. 소고기 국물이 먹고 싶을 때는 마포옥이나 대흥설농탕에 간다. 마포역 근처 마포옥은 요즘 한우의 맛을 반영한다. 한국인들이 기름 맛을 알기 시작하면서 한우는 본래의 특징과 달리 점점 지방/마블링을 늘리며 농후한 맛을 내는 고기가 되고 있다. 마포옥 설렁탕은 그 특징을 머금은 듯 사치스러운 국물 맛이 난다. 장한평역 근처 대흥설농탕은 옛날 한우 국물 맛이 이랬겠구나 싶은, 고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맛의 국물을 우린다. 사치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의 차이를 알고 싶다면 두 집 설렁탕 국물을 번갈아 먹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서울의 소고기 국물보다 멸치 국물 요리를 더 좋아한다. 서울은 고급 문화보다는 서민 문화가, 값비싼 것보다 적당한 것이 더 아름다운 도시다. 그 면에서 멸치와 건어물로 국물을 내는 식당이 나의 서울의 보물이다. 익선동 찬양집 해물칼국수는 가격과 유명세를 떠나 절대적인 맛이 훌륭하다. 매일 자가제면을 하는 면의 탄성, 밀가루 전분이 국물에 섞여 찐득해진 감촉 사이로 조개와 멸치 등등 해산물의 짭짤한 감칠맛이 올라온다. 그 맛 때문에라도 젊은이와 장년층 사이를 지나치며 익선동에 간다.
맑은 멸치 국물도 좋다. 이런 계통으로는 삼각지 옛집국수를 좋아한다. 맑게 우려 투명한 멸치 국물 속에 찬물로 헹구어 탄력을 극대화시킨 국수 한 주먹이 들어 있다. 이런 음식은 잘 쓴 산문처럼 즐기기는 쉽지만 만들기는 어렵다. 삼각지는 국방부와 근처 외국인과 동네 사람들과 아모레퍼시픽 권역 대기업 직원들이 엇갈리며 서울의 다양한 인구표본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서울은 급격히 개발되며 구별, 동별, 아파트 단지별로 동질화된 소규모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 다양성을 볼 수 있는 곳이 점차 줄어든다. 옛집국수는 그 면에서도 소중하다.
소뼈 국물에 고춧가루 등을 더한 해장국 국물 역시 서울만의 맛이다. 서울에 오래 살았다면 나만의 해장국집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내 마음 속 서울 해장국집은 구기동 장모님 해장국이다. 중장년층 거주지라서인지 등산객을 노려서인지 해장국집 중에서는 맛이 덜 자극적이다. 서울이 세계의 다른 대도시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는 시내 곳곳에 본격적인 산이 있다는 점이다. 산에서 불어 오는 깨끗한 바람을 느끼며 선지해장국같은 음식을 즐기는 거야말로 서울의 다이닝이라고 생각한다.
국물은 그 자체로 서울과 한국의 상징 같기도 하다. 일단 국물이 되고 나면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안에 어떤 요소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국물은 그런 음식이다. 투명한 듯 불투명하고 의뭉스러운 듯한 동시에 담백하고 과정적으로는 뭔지 모르겠는데 결과적으로는 맛있다. 이거야말로 진짜도 가짜도 없고 친구와 적의 개념도 희미하고 과거와 미래가 뒤틀린 듯 뒤섞여 있는 21세기 서울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국밥을 한 그릇 시켜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털어먹고 나오는 것, 그게 서울을 즐기는 방법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원고의 요청 사항 중에는 서울 다이닝 추천 가이드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 기호지만, 미슐랭 가이드보다는 빕 그루망이 더 맛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신뢰하는 지표는 해외 가이드가 아니라 무궁화 모양 간판이 붙은 구별 모범음식점이다. 한국 공무원의 미감은 몰라도 미각은 정말 믿을 수 있다. 구별 모범음식점에 가서 실망한 기억이 없다. 아울러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박찬호의 사인이나 이명박의 기념사진이 있는 곳은 100% 맛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선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이 모르는 그 곳 서울> 이라는 책에 보낸 원고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식당과 그 이유' 에 대한 원고였다. 하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 해서 낑낑댔는데 적어두고 나니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일은 하고 볼 일인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