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그것 뿐이다
나는 서울 서부 어느 동네의 단독주택 2층에 혼자 산다. 적당히 넓은 마당에는 목련과 모과와 감나무가 있다. 나는 단독주택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있었고, 그 환상 때문에 몇 년 간 자잘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혼자 살기 전에는 평생 서울 서남부 어느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30대 중반쯤 되니 집을 떠나는 게 가족과 나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월간 라이프스타일 잡지의 에디터로 일했다. 사무실은 강남구에 있었고 일상이 불규칙했다. 규칙적인 일상을 사는 가족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소소한 불편이 있었다. 아파트를 떠나 녹지 사이에서 살고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쌓였는지 어느 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찾기 시작했다.
가격에는 이유가 있고 나는 돈이 모자랐다. 다행히 나는 한국의 비싼 동네에 살 이유가 없었다. 미혼이었으니 학군이 필요 없었다. 몸이 건강하고 낡은 차가 있었으니 역세권이 필요 없었다. 그럴싸한 동네에 살고픈 의지가 없었으므로 멋진 동네를 볼 필요도 없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의 일 중 하나는 도시의 온갖 그럴듯한 것 구경이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서울의 그럴싸한 것들이 때로는 얼마나 얄팍한지 대충 알게 되었다. 얄팍한 것 근처에 살기 위해 월세를 더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건에서 벗어나면 여전히 살 집이 많았다. 나는 시간을 들여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생각했다. 첫째 조건은 동작대교 서쪽. 둘째는 녹지 인접. 셋째는 도서관과 대학교 인접, 넷째는 노량진 수산시장 인접이었다. 각 항목을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 스스로가 서서울 권역에 익숙했다. 나는 (한강변과 한강 인접성에는 관심 없는 대신)녹지를 중요히 여겼다. 서울시내의 대학은 그 자체로 녹지이며 주변 생활 물가도 저렴한 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산물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현실성이 없는 조건에 입각해 집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인터넷에 아주 저렴한 단독주택 월세 매물이 올라왔다. 동작대교 서쪽이었고 바로 뒤가 산이었으며 근처에 도서관과 대학교도 있었다. 노량진 수산시장과는 조금 멀었지만 빠듯한 형편에 그것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대신 아주 낡았기 때문에 고쳐 살기로 했다.
현실성 없는 조건으로 집을 찾았고 그 집을 고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집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고치는 과정에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내가 겪은 일을 여기서 하소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세상의 싼 물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집에 들어가던 2017년에 나는 허덕이고 있었다. 직업적으로는 불안했고 재정적으로는 미약했으며 미래라는 건 김이 서리고 온통 긁힌 안경 렌즈를 통해 보이는 풍경처럼 뭐 하나 확실해보이는 게 없었다. 인테리어 경험은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살아야 할 집은 그때 내 역량에 비해 너무 힘겨운 곳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정 끝에 나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겨우 준비를 마쳤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대체 왜 그러냐"고 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인테리어를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공사는 이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더구나 나는 처음 혼자 나와 사는 것이었으니 모든 것을 새로 채워야 했다. 옷장부터 수건까지, 비누받침부터 다리미까지. 잡지 일을 몇 년 하다 보면 현실도피가 버릇같은 취미가 되고, 인터넷 검색처럼 손쉬운 현실도피도 없다. 나는 일하는 틈틈이 지쳤을 때 집에 들여야 할 것들을 하염없이 찾곤 했다. 아주 천천히, 집에 들어가야 할 것들을 하나씩 주문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느꼈다.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A)파는 사람이 말하는 정보와 B)사는 사람이 말하는 리뷰 등의 정보와 C)내가 궁금해하는 정보는 모두 각자 달랐다. 때문에 '어떤 물건을 사야 할까?" 라는 질문은 '어떤 물건이 좋다는 건 무엇을 말할까?' 라는 질문으로 커졌다. 예를 들어 진공청소기를 사려면 무슨 조건을 봐야 할까? 왜 진공청소기는 5만원부터 120만원까지 있을까? 5만원짜리를 사는 게 바보일까 120만원짜리를 사는 게 과소비일까? 이런 고민에 답을 주는 '콘텐츠'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50개씩 띄워 두고 액셀 표를 만들어가며 내가 만든 스펙 표를 채워 나가는 식으로 집안에 들어갈 물건의 정보를 하나씩 배워 나갔다. 이게 내 개인적인 성격인지 직업적인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잡지 에디터라는 내 직업의 직무를 정보 수집, 편집, 재가공, 시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 면에서 봤을 때 수준 높게 '에디트'된 상품 정보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논하는 건 이 원고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어떤 물건이 지금의 가격과 지위를 가지게 된 정황을 약간은 알아야 했다. 그래야 7천원~12만원짜리 커피 포트 사이에서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정용품에 대한 나름의 검색을 해 나가면서 물건들을 하나씩 주문했다. 어떤 물건은 가장 저렴한 걸 부득부득 찾아 샀지만 어떤 건 과감히 무리했다. 나무 가구는 모두 중고로 샀지만 철제 가구는 신품을 샀다. 책장은 한국에서 가장 저렴한 걸 찾았지만 조명은 전부 외국에서 샀다. 이런저런 과정 끝에 내 첫 집에서의 삶이 조금씩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이때쯤 감사한 행운이 겹쳐 단행본 계약을 하게 되었다. 요즘 필자가 별로 없는지 단행본 계약이 이어졌다. 첫 책, 두 번째 책, 세 번째 책, 모두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그러다 지금 사는 집을 주제로 네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출판까지 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옛날풍 정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래야 할 사정이 생겼고, 약속을 지키는 게 프로의 기본 소양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그게 2021년작 <첫 집 연대기>다.
책을 내고 나니 상상도 못 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평생 나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왔고, 내가 평범하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이 평범한 모양새로 살고 있다. 반면 독자 리뷰를 보니 나의 결정을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이 내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이런 삶의 모양이 특이해 보이는지 일간지에서 인터뷰까지 해 주셨다. 이 과정에서 나는 사람들이 집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집에 하는 소비를 무엇이라 여기는지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집을 소재 삼고 주거를 주제 삼아 여러 이야기를 한다. 집이 이래야 한다는 주장도 많고, 집이 이런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집은 생필품인 동시에 자산이고, 거주는 현실인 동시에 개인적 기호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주장도 해석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내 상황을 할 수 있는 한 소상히 밝히고, 그 상황 속에서의 내 선택을 설명하고, 거기서 드러날 내 태도를 보여주려 했다. 내 태도에서 무엇을 느끼실 지는 독자의 자유이며 독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주택에 살아 보았기 때문에 아파트의 장점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아파트의 획일화된 모듈러형 주거 모델에 큰 흥미를 못 느끼는 성격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건 내 감정일 뿐. 주택에 살면 한국 지형에서 아파트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발전된 모델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다. 21세기 한국은 의식주의 모든 요소가 모듈러화되고, 그 모듈러의 가장 강력한 덕목은 가격대비 성능이다. 한국형 모듈러 라이프의 모든 정보 탐색과 구매 결정은 한국어 포털사이트의 정보와 PC/모바일 디바이스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한국형 아파트는 그 과정에서 태어난 최적의 결과물이다. 현대 한국의 주거에서 신형 아파트의 최적화를 넘어서는 모델은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거주와 관련된 선택지 중 무엇 하나도 옹호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없다. 매매에도 전세에도 월세에도, 청약에도 리모델링에도 신축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서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살아본 경험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인 동시에 어느 정도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독자 제위께도 이 졸고가 거주에 대한 본인의 생각에 참고가 되길 바란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졸저 <첫 집 연대기>에 실려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만드는 월간지 <출판문화> 2021년 4월호에 원고를 보냈다. 4월호 특집이 '집'이라 책에 나온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적다 보니 책 요약+간단한 코멘트가 되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 출판인들의 소식지에 참여하게 된 건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특집 필진이 굉장히 화려한데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나 싶긴 했지만.
반면 책을 내면 으레 두어번은 하던 북토크가 별로 없다. 코비드-19 때문인지 북토크에 적절하지 않은 책이라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둘 다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