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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pr 01. 2016

오혁의 리메이크

언젠가 소녀였던 어떤 여자에게


누가 이 글을 읽을지 아직도 가늠이 안 된다. 나이도 얼굴도, 이 원고를 읽으실 때의 표정도 상상하지 못하겠다. 내 원고 옆에 있는 훌륭한 기획들을 보면 뷰티톡은 냉이나 봄동처럼 싱그러운 분들께서 많이 읽으실 것 같다. 고민도 많이 했다. 나는 소녀친구가 있는 나이도 아니고 소녀에 딱히 관심도 없는데(정말이다) 소녀들이 읽을 원고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이영훈이 만들고 이문세가 부르고 오혁이 다시 부른 '소녀'처럼만 한다면 공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노래에서 소녀라는 말은 제목을 제외하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사도 너무 어른스럽다. 소녀에게 건네는 말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이나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같은 말을 소년이 할 리 없다. 17세 남자아이에게 '하늘에 그릴 옛 생각들'이 있을 확률은 높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남자들은 생각이란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 곁에만 머물러 달라고, 떠나면 안 된다고. 이런 노래를 부르는 남자라면 이미 어른이다. 노래로 마음을 전하는 남자 맞은편에 있을 여자도 소녀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래의 제목이 '소녀'라는 사실이 더욱 짠해진다. 나는 '소녀'가 어른이 어른에게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과거를 바라보면서.


남자나 여자나 마음 속 어딘가는 평생 늙지 않는다. 피부와 관절과 기억력이 점점 노쇠해져도 지금 여러분이 가진 가장 예민한 무엇인가는 변함 없이 남아 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은 마음, 깨지기 쉬운 그릇을 내려놓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살짝 기대고 싶은 마음. 이런 건 나이가 들어도 둔해지지 않는다. 한때의 소년과 소녀였던 마음과 정신은 시들어가는 몸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간다.


오히려 어떨 때는 더욱 강렬하게 기대고 싶어진다. 노래의 가사처럼 외로워서 울게 되기도 한다. 사실 생물학적 소녀들은 외로워서 울지는 않을 것 같다. 괴로워서 울면 모를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역시 어른스러운 약속이다. 찬 바람 속에서 외로워 울 때의 고통도, 항상 그대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아야 힘이 실리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도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종종 아빠 옷이나 엄마 화장품을 어색하게 입고 칠한 아이들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연말정산을 하거나 종종 비싼 술을 마시거나 택시를 잡는 게 어색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도. 그러니 '소녀'는 언제의 누구든 기대고 싶어지는 노래다.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떠나지 않아요' 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설레는 약속이니까. 그나저나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원고를 소녀들이 읽는다면 새삼 영광스러운 일이다. 소녀에게 읽힐 글을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앱 매거진 <뷰티톡>에 연재하는 원고를 여기 옮겨 둡니다. 노래 가사를 빌어 말하는 일종의 연애 칼럼입니다. 연애도 여자도 노래도 화장품도 잘 모르는데 이런 일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부족할 겁니다. 어떤 형태의 지적이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브런치에는 연재 시점의 2주 후인 매주 금요일에 원고가 올라갑니다. <뷰티톡>은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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