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찬용 Apr 03. 2016

최신형 시대착오

라이카니까, 라이카만 할 수 있는 것


라이카 카메라는 처음부터 원조였다. 이들은 세계 최초로 35mm 필름을 쓰는 휴대용 카메라를 만들었다. 지난 번의 뱅앤올룹슨도 그렇고 나는 이 원고를 옛날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내가 옛날 이야기라면 식음을 전폐할 만큼 좋아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라이카 M 모노크롬(이하 M-M)에서 라이카의 이야기와 역사는 정말 중요하다.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만든 오스카 바르낙 씨는 몸이 약했다. 그는 풍경사진을 찍는 게 취미였는데 천식을 앓아서 당시 쓰이던 무거운 카메라를 갖고 다니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스카 바르낙 씨는 영화에 쓰던 35mm 필름을 넣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고안했다. 이름은 우르-라이카, 첫 라이카다. 역시 필요만큼 절실한 동기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건 라이카 카메라가 전통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라이카의 본사 자리에는 오스카 바르낙이 첫 라이카를 만들고 처음 사진을 찍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아예 돌바닥에 쇠 판을 만들어 박아 두었다. 라이카를 좋아해서 거기까지 온 사람들은 자신의 카메라(아마 라이카겠지)로 오스카 바르낙 씨의 첫 테스트 컷과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건조한 한국 남자들에게는 '이게 뭐야'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뭉쳐서 캐릭터가 된다는 것을 유럽 사람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별 것 아닌 것이 모여서 별 것이 된다. 그 사실을 안다면 조금씩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라이카처럼.


라이카가 100여 년 동안 시장에서 살아남는 동안 세계와 업계에는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손목시계와 카메라는 서유럽에서 태동한 정밀기기라는 점, 그리고 대륙 건너편의 일본 경쟁자에게 고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럽은 난생 처음 보는 근성으로 뭉친 아시아의 라이벌을 당해내지 못했다. RF카메라 부문에서는 라이카를 이길 수 있는 브랜드가 없었는데 일본의 경쟁자들은 SLR이라는 포맷을 만들어 시장 판도를 바꿔버렸다. 기계장치였던 카메라에 슬슬 전자 부품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이미지 저장 방식마저도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다. 라이카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유무형적으로 무엇을 가졌는지, 자신의 캐릭터가 무엇인지를 점차 깨달아간 것 같다.


라이카 캐릭터의 본질은 원조다. 물량 경쟁에서는 질 수 있어도 시장의 원조라는 역사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따라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분야의 최초입니다'라는 선언은 브랜드를 통째로 사더라도 살 수 없는 자산이다. 라이카는 그 사실을 아주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오스카 바르낙이 처음 사진을 찍은 자리를 보존해둔 것이 좋은 예다.


라이카의 진짜 경쟁력은 전통에 기반한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계속 고성능 카메라를 만든다는 점이다. 그 고성능이란 라이카 렌즈의 대단한 감도이기도 하고, 요즘 라이카인 T가 구현한 혁신적 인터페이스이기도 하다. 역사만으로는 아무것도 남겨둘 수 없다. 옛날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역사를 만지작거리는 20세기 브랜드 엄청 많다. 오래된 기업이나 단체는 흔히 '전통을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혁신할 것이냐?'는 이지선다에 마주치게 된다. 이건 틀린 질문이다. 제대로 된 질문은 '어떻게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요소를 보기 좋게 봉합시키느냐?'다. 물론 앞 질문보다 뒷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게 더 어렵다. 하지만 성공은 어려운 문제에 답을 구했을 때 찾아온다. 라이카는 이 질문에 아주 훌륭한 답을 냈다. M-M은 이들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풍향계같은 물건이다.


라이카 M-M은 흑백 사진만 촬영되는 풀프레임 디지털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나오자마자 몇 가지 이유로 화제가 됐다. 요즘 같은 세상에 흑백만 촬영되는데 보디 가격만 1천만원에 가까우니까. 요즘 흐름과 역행하는데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물건이 나왔는지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라이카 카메라 측에서는 확실한 논리가 있다. 흑백 CCD는 표현력이 더 좋다. 이들은 실제로 M-M 전용 흑백 CCD를 개발했다. 현행 디지털 카메라의 컬러 CCD는 색과 계조를 함께 담기 때문에 미세하게 표현력이 떨어진다. 반면 흑백 CCD는 각각의 픽셀이 계조를 담는 데에만 쓰인다. 라이카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 CCD로 촬영할 경우 '내추럴 샤프니스'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여기에 라이카 렌즈가 들어간다면 당연히 아주 묘사력이 뛰어난 사진이 나온다. 그래서 <미디어잇>은 이 카메라의 리뷰 기사에 '사진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제목을 달았다. 맞는 말이다. 사진의 본질.


본질 탐구도 아무나 못 한다. 이렇게 컬트적인 스펙과 철학적인 논리를 가진 물건을 일반인용으로 판매할 수 있는 브랜드는 라이카밖에 없다. 만들 수는 있어도 팔 수가 없다. 내가 사진 애호가와 의기투합해서 절치부심하고 대단한 흑백 CCD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어 봤자 아무도 안 산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라이카는 이런 물건을 만들어서 팔 수 있는 브랜드라는 것이.


멋진 말을 하기는 쉽다. 어려운 건 멋진 말을 했을 때 남들이 동조하는 위치까지 가는 것, 멋진 말을 했을 때 '그래, 저 사람은 저런 말을 할 만 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멋지게 사는 것이다. 라이카는 자신의 역사를 통해 M-M처럼 아주 한정적인 수요를 가진 고가 카메라도 시장에 던져볼 수 있는 브랜드가 됐다. 라이카의 초창기에 함께 카메라를 만들던 다른 회사 중 훌륭하게 살아남은 곳은 라이카밖에 없다. 라이카의 캐릭터가 유일한 성공 비결은 아니겠지만 비결 중 하나인 것만은 확실하다.


테크 제품은 보통 적당한 가격에 최대한의 성능을 집어넣어 판다. 아니면 가장 최신의 기술을 상품화해서 판다. 라이카는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역사를 기반으로 타협하지 않고 완성도 높은 기계를 만든 후 멋진 이미지를 붙여서 높은 값을 받고 판다. 그런 면에서 라이카의 캐릭터는 같은 업계의 니콘이나 페이즈원이 아니라 고가 패션하우스의 문법을 쓰는 에르메스나 롤렉스에 더 가깝다. 실제로 라이카는 패션하우스와 협업도 자주 한다. 이미지가 중요한 회사 둘이 모여 더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면 둘 다에게 좋으니까.


21세기의 기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성능은 꼭 지켜야 하는 조건일까, 아니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일까. 어떤 기계의 성능을 지키기 위해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걸까, 아니면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특수한 성능을 만드는 걸까? 라이카가 만든 21세기형 레트로 기계에는 이런 질문이 들어 있다. 라이카는 답도 냈다. 정답인지 모범답안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답을.



+송공호 님과 존과 지니 님께서 실제 사진을 첨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러게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네요. 플리커에서 라이카 M-M으로 찍은 사진을 몇 장 찾아 보았습니다(이미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2.0에 의거해 공유와 복사가 가능함을 확인했습니다).



MARCO


Christopher Michel


Christopher Michel


Andreas Øverland



작가의 이전글 오혁의 리메이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