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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pr 08. 2016

러블리즈의 재채기

내가 소녀라면


러블리즈의 '아츄' 속 소녀에겐 '맛있는 걸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를 '다정하게 깨우고 싶'기도 하다. 맛있는 것 해주기와 아침에 깨워 주기라니 생각만 해도 풋풋하다.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에서도 풋풋함 최상위권에 있을 것 같다. 왜 하필 저 둘일까.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요리에 정진하는 걸까.

글쎄. 나는 그녀가 가스불이나 켜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찍 일어나 남을 깨워본 적이 있는지도. 소녀도 순순히 인정한다. '아직 요리는 잘 못하지만'서도, '아침잠이 좀 많긴 해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는 것을. 소녀나 소년이 서투른 건 당연하다. 중요한 건 너를 위해 변하겠다는 마음이다. 내가 잘 못 하는 거라도 널 위해 하고 싶다는 적극성은 미숙하든 말든 예뻐 보인다. 그래도 소녀가 소년보단 훨씬 낫다. 소년들은 자기가 서투르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래 속 소녀도 아직 어른이 되진 못했다. 그녀에겐 '그대를 위해 몰래 감춰놓은 애교'가 있어서 그가 '지루하지 않게 웃게 해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교도 요리도 깨워주기도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상상을 말하는 초반에 부드럽게 흐르던 노래는 현실로 들어가며 서서히 분위기가 변한다. 러블리즈는 '너는 내 맘 모르지' 부분을 한 음절씩 눌러 발음한 후 최근의 가요 중 가장 도전적인 후렴구를 터뜨린다. 아츄!

아츄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 표현도 못하는 마음을 말한다. '마음에 꽃가루가 떠다니'는 것 같아서 '재채기가 나올 것 같'고 '입술이 너무 간지러워 참기가 힘들'지만 노래 속에서 그녀는 생각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 마음엔 있으나 행동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연약한 마음이 노래를 듣는 사람의 마음마저 움직인다. 미세한 꽃가루처럼 이 노래는 누구에게나 있었을 한 때를 건드린다.

마음을 신나게 전하는 2절의 후렴을 끝낸 후 노래는 템포와 분위기를 늦춘다. 현실 속의 소녀는 힘없이 독백한다. '소중한 너의 친구란 그 말이 나는 그 말이 참 싫다/밤새 쓰다만 편지와 말하지 못한 내사랑'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재채기 뿐이다. 그가 무슨 일인지 묻는다 해도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겠지. "봄이라서 그래" 정도 말고는. 사실은 그게 아닌데.

나는 이제 소녀와는 거리가 먼 아저씨인데도 아츄를 들으며 옛날을 떠올렸다. 내가 아저씨가 아니던 때를,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싶다고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이 나던 기분을, 말하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에서 구름처럼 부드럽게 뭉쳐지던 공감을. 지금의 나도 이런데 내가 소녀라면 이 노래가 마디마디 더 절실히 와닿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싶고. 그때나 지금이나 소녀의 마음은 너무 어렵다. 아츄도 결국 아무 기색 없는 마음이잖아. 소녀들은 기왕 마음이 생겼으면 용기를 좀 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아저씨는 아저씨처럼 생각해본다.



앱 매거진 <뷰티톡>에 연재하는 원고를 여기 옮겨 둡니다. 노래 가사를 빌어 말하는 일종의 연애 칼럼입니다. 연애도 여자도 노래도 화장품도 잘 모르는데 이런 일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부족할 겁니다. 어떤 형태의 지적이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브런치에는 연재 시점의 2주 후인 매주 금요일에 원고가 올라갑니다. <뷰티톡>은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에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츄'의 뮤직비디오는 대단한 패키지라고 생각합니다. 작사-작곡-영상의 각 창작자가 굉장히 뛰어난데 서로의 합도 아주 잘 맞습니다. 21세기 한국이 이 정도나 되는 걸 만든 일은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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