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과 메시지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서구 문화의 온갖 상징을 가져다 믹서에 넣고 심술궂게 갈아 내놓은 주스 같은 영화다. 감독 매튜 본은 패션의 오묘한 상징성에 정통한 것 같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복장을 통해 노골적으로 각자의 계층과 배경을 드러낸다. 명문가의 자제, 그들과 경쟁 면접을 치르는 차브 소년, 백인 영국 신사, 흑인 미국 IT 갑부, 이들을 설명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역시 옷이다.
패션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킹스맨]의 영국풍 정장은 그냥 멋있기만 한 옷이 아니다. 이 영화는 스파이영화의 필수요소인 선악구도를 옷차림으로 가른다. 옷차림으로만 보면 이 영화는 영국 정장과 미국 캐주얼의 대결이다. 킹스맨과 발렌타인의 대결에서 킹스맨이 이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사도가 더 옳기 때문이다. 좋은 말투보다 중요한 건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태도, 신사의 조건은 귀족의 혈통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고귀해지는 거라는 세계관, 기독교 정신을 오용하는 신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용기야말로 [킹스맨]의 사상적 척추 같은 것이다. 그 정신을 감싼 것이 콜린 퍼스의 남색 줄무늬 정장이다. 이 과정을 거쳐 영국식 정장이 신사도 정신의 유니폼이 된다. 킹스맨이 품은 고결한 정신의 포장지가 되는 것이다.
패션의 완성은 사람이다. 옷을 입은 사람. 멋진 사람은 뭘 해도 멋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멋있는 사람이 어떤 옷을 걸치는 건 그쪽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뉴밸런스 992와 스티브 잡스, 롤렉스가 로저 페더러, 모두 사람이 쌓은 이미지를 물건에 접붙이려는 노력이다. [킹스맨]은 멋있는 옷을 입은 멋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뭘 할까? 뭘 하긴, 팔아야지.
실제로 안팎으로 멋진 그 옷을 판다. [킹스맨]의 옷은 영국의 인터넷 쇼핑몰 ‘미스터 포터’에서 살 수 있다. 실사영화의 등장인물로 캐릭터상품을 만든 셈인데 이게 꽤 진지하다. 킹스맨 캐릭터상품은 현실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의 사치품이다. 킹스맨 로고를 새긴 포켓 스퀘어가 드레이크스, 영화 대사로도 나오는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가 조지 클레버리, 총알을 막아주는 우산이 스웨인 애드니 브리그, 셔츠는 턴불 앤 아서 같은 식이다. 21세기의 금언을 말하던 미중년의 정체는 사실 인간 광고판이었던 것이다.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매튜 본 본인이다. 그는 보다 발전된 상업적 프로젝트를 생각하다가 영화 속 스파이의 옷장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미스터 포터의 창립자 나탈리 매스넷에게 접촉했다. 둘은 잘 통했던 모양이다. 영화의 의상 제작을 총괄한 아리앤 필립스는 미스터 포터의 구매총괄 토비 배이트맨과 조율하며 영화의상을 실제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은 매튜 본과 미스터 포터가 나눠 가지고 아리앤 필립스도 디자인 비용을 받는다. [블룸버그] 에디터 크리스 로브자르가 2015년 2월 13일에 소개한 내용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냉정한 교훈은 점점 교묘해진다. 피가 케첩처럼 튀는 액션영화의 시퀀스 사이에서 우아한 윤리를 말하는 남자가 정장 모델이었다니. 의미 없는 질문이겠지만 뭐가 먼저일까 싶어지기도 한다. 상업적 메시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현대의 윤리를 빌려온 걸까? 아니면 꼭 퍼져야 하는 교훈을 전하기 위해 상업의 요소를 차용한 걸까?
다만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기 이전에 상인의 나라였다. 이들은 무역적자를 메꾸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아치우다가 거절당하자 항구에 대포를 쏜 '전통'이 있다. 그렇게 치면 영국식 전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멋진 양복을 입고 전 세계를 누비는 셈이 되겠다. 마지막 사실 하나 더, [킹스맨]속편 제작 여부와 상관없이 옷은 계속 출시된다. [킹스맨 2]제작도 확정되었으니 더 멋있는 정장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에서도, 쇼핑몰에서도.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를 조금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