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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01. 2016

모듈과 효율

뼈가 같아요



폭스바겐은 2012년 2월 MQB라는 신규 플랫폼을 발표해 7세대 골프부터 적용하고 있다. MQB는 모듈 키트를 뜻하는 독일어의 머릿글자를 딴 말로, 그 이름처럼 차체의 골격을 각자의 모듈로 나눴다는 뜻이다.


MQB는 기존의 플랫폼 공유보다 더 나아간 방식이다. 차를 구성하는 섀시 등의 기본 뼈대를 플랫폼이라고 한다. 플랫폼을 공유하면 아무래도 뼈가 같으니까 개발비가 줄어든다. 그래서 큰 회사들은 플랫폼을 공유했다. 다만 뼈대가 같으니까 비슷한 크기와 성격의 차에서 플랫폼을 공유할 수 있었다. 폭스바겐 골프와 아우디의 A3, 포르쉐 카이엔과 폭스바겐 투아렉 등이 같은 플랫폼을 공유한 차의 예다. MQB 방식에서는 같은 모듈 안에서 다른 체급의 자동차도 나온다. 실제로 폭스바겐은 폴로와 파사트를 한MQB 아래에서 생산할 수 있다. 이 두 차량에서 공유되는 부분은 앞바퀴 뒤쪽의 엔진 위치 뿐. 모든 엔진이 같은 위치에 탑재되는 것만이 MQB 플랫폼 차량의 공통점이다.


기술은 복잡하지만 근본은 단순하다. 고효율. 모듈화가 촘촘해지면 공유되는 부품이 많으므로 생산관리 측면에서 유용하다. 플랫폼 개수가 적어지면 자동차 생산비용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개발비도 절약할 수 있다. 방송으로 치면 프리 프로덕션에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다른 부가가치상품이 나올 여지를 많이 만들어두는 것이다. 비용을 많이 들이더라도 여러 군데에서 적용되는 플랫폼을 만든다면 그만큼 물건을 많이 팔 수 있을 거란 전제도 깔려야 한다. 그러니 한번 틀을 잘 짜면 국제적으로 물건을 팔 수 있는 다국적 제조 대기업이어야 MQB 정도 규모의 뭔가를 생각할 수 있다. 반면 큰 회사라면 꼭 폭스바겐이 아니라 다른 곳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국제적 자동차 회사도 한다. 르노와 닛산의 CMF, 볼보의SPA, 토요타의 TNGA는 MQB와 비슷한 개념이다.


원론적으로 모듈화는 자동차회사 밖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다만 그걸 손목시계에서 볼 줄은 몰랐다. 태그호이어는 손목시계 박람회 바젤월드 2015에서 모듈화 개념을 적용한 손목시계를 선보였다. 시계의 케이스는 전체적인 성격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자동차 플랫폼과 비슷한 성격이 있는데 태그호이어는 시계 케이스를 모듈화시켰다. 케이스와 러그(시계줄과 케이스를 이어주는 부분)를 각자 모듈화해 생산 단계에서 갈아 끼울 수 있게 한 것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발상이다. 


손목시계는 크기가 작아서 조금만 바뀌어도 확 달라 보인다. 러그 정도면 시계의 인상과 기능, 캐릭터를 결정하는 중요한 디자인 요소라고 봐도 된다. 기존의 시계 제작 개념으로는 러그 모양이 다른 세 가지 케이스를 출시하기 위해 세 개의 케이스를 만들어야 했다. 태그호이어의 신제품 방식으로는 러그 세 개만 바꿔도 세 종류의 케이스가 나온다. 당연히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태그호이어의 브랜드 슬로건은 ‘스위스 아방가르드’다. 새로운 시계와 그 제작 방식에 대한 평가야 각자의 세계관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계 케이스에 모듈화를 도입한다는 관점이 전위적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스위스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오래 된 집단은, 특히 유럽의 오래된 기업이나 단체는 혁신이나 신기술 같은 건 잘 받아들이지 않은 채 좀 덜 효율적이어도 예전 방식을 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일 뿐이다. 전통은 오랜 생존의 부산물이지 오랜 생존의 비결이 아니다. 유럽의 제조업 강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방식을 찾기 위해 한결같이 치열하게 새로운 물건과 개념을 만든다. 전통의 이미지라는 간판을 세워둔 채, 그 간판 뒤에서.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를 조금 고쳤습니다. 


올해의 태그호이어는 바젤월드에서 타사의 시계에 비해 가격을 대폭 낮춘 투르비용 손목시계를 출시했습니다. 투르비용은 고급 손목 시계에 많이 쓰는 기술인데, 이 기술의 가격을 낮춘다는 개념입니다. 참 부지런한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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