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용기
21세기 생활가전에서 보이는 주된 특징은 통합과 연결이다. 다양한 기능이 한 기계 안에 들어가고, 그 기능이 무선통신을 통해 스마트폰 같은 디바이스로 조작된다. 그 콘셉트를 확장시키면 야마하의 렐릿 같은 물건이 나온다.
야마하 렐릿은 휴대용 스피커와 조명을 합친 기기다. 빛과 소리가 하나의 기계 안에서 켜지는 개념이다. 충전지를 내장해서 음악 감상만 할 경우 최대 8시간까지 쓸 수 있으며 조명까지 켜도 3.5시간까지는 구동된다. 실생활에 적용시키면 풀빌라의 실외 테라스에서 저녁에 불을 켜 놓고 음악을 틀어둔 채 책을 읽어도 음반 세 장 정도는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야마하 렐릿의 활용 가능성은 스마트폰과 쓸 때 더 풍성해진다. 아이튠즈와 구글플레이 모두에서 받을 수 있는 전용 어플리케이션인 DTA 컨트롤러를 이용해 조명과 음악을 세세한 수준까지 조절할 수 있다. 고음/중음/저음을 조절할 수 있는 건 물론 월요일에는 8시에 울리고 화요일에는 9시에 울리도록 타이머를 설정해둘 수도 있다. 21세기 문명이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 같다.
이 물건이 일본의 야마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일본산 제품은 품질은 좋았어도 ‘저게 아니면 안 된다’는 정체성이 부족했다. 렉서스는 조용했지만 매력은 없었고 소니도 좋긴 했지만 정체성이 사라지며 특유의 아우라도 빛이 바랬다. 그런 면에서 야마하 렐릿은 보통 신제품보다 더 큰 의미가 될 수 있다. 렉서스의 파격적인 변화처럼, 20세기 문명의 ‘패스트 팔로워’였던 일본이 정체성으로 승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종형이 아닌 독창성이 앞으로의 일본 기업에 필요하다고 일컬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독창적인 건 어렵기 때문에 위험을 피하는 무난한 제품을 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중국과 한국에 추격당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본래의 일은 제대로 가지면서도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고 독특한 무엇인가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실감하고 있다. (중략) 독자성이 있는 진일보한 것을 만들 수 있는지가 문제 되고 있는 시대다. 야마하라는 전통 있는 회사가 ‘레릿’처럼 디자인이 강한 조명과 합체한 독특한 제품을 세상에 내놓은 건 위험한 모험 같기도 하지만 굳이 그것을 낸 회사의 직원인 것이 자랑스럽다. (야마하는)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활력 있는 회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야마하뮤직 재팬 AV 유통영업본부장 사루야 토오루 씨의 말이다.
렐릿이 성공할지는 아직 모른다. 시행착오일 수도 있다. 저 물건을 만든 회사의 직원도 렐릿이 ‘독특한 제품’이기 때문에 ‘위험한 모험’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누군가는 불확실성의 맨 앞에서 발을 뻗어 봐야 한다.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춰 봐야 한다. 렐릿은 21세기라는 거대한 정체기에서 찾기 힘든 낙관과 활력을 가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시대의 물건이 될 자격이 있다.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이 원고를 만들 때쯤엔 오래된 브랜드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게 한참 유행이었습니다. 세상은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비싸고 좋은 걸 찾기 위해선 계속 뒤돌아봐야만 하는 걸까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는 이 시대의 무엇에 21세기의 고전이라는 호칭을 붙일까?’ 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여섯 개의 예상 답안을 제시했습니다. 야마하 렐릿은 유명하거나 성공하진 못했어도 시대적인 뭔가를 담고 있는 물건이라 판단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