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머리카락만은
요즘이 저성장시대라지만 아주 전망이 밝은 분야도 있다. 21세기 유통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업계는 헤드폰, 스마트폰 TV 액세서리, 그리고 남성용 그루밍 용품이다. 통계 포털 스타티스타가 예측하는 2016년의 남성용 그루밍 업계의 규모는 214억 달러. 한국 돈으로 치면 20조 원이 넘는다. 하긴 요즘은 우르오스처럼 ‘하나면 다 된다’는 남성용 화장품 광고가 나오는 때다. 이건 1~20년 전만 해도 광고가 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 남자들은 웬만하면 하나만 발랐으니까.
그루밍의 영역에는 헤어스타일도 포함된다. <가디언>에 이 경향을 자세히 소개한 기사가 나왔다. ‘언제 남자 머리 모양이 이렇게 모험적으로 되었을까?’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기사에 따르면 영국 인터넷 쇼핑몰 미스터 포터는 2015년에 헤어 카테고리의 상품 부문 매출이 100% 늘었다고 한다. 위에서 예를 든 통계치도 이 기사에서 나온 이야기다. 남자 헤어스타일 시장은 폭증 수준으로 성장했다.
기사의 지적처럼 남자 헤어스타일이 지금처럼 다양한 적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번 헤어(번 빵bun 모양이 되도록 묶은 머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기른다. 어떤 사람은 옆머리 전체를 삭발 수준으로 깎고 지그재그로 선을 판다. 염색도 특정 색이 유행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색으로 아무렇게나 한다. 요즘 남자의 헤어스타일은 질적으로도 풍성하다.
21세기 남자 헤어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남자 헤어스타일 부분만은 세계가 이미 평화롭게 서로의 문화를 교환하며 각자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다. 백인 저스틴 비버가 흑인풍 드레드를 하고 흑인 패럴 윌리엄스는 금발 삭발을 한 채 레드 카펫에 선다. 아주 미래적인 파란색 염색 머리 반대편에서는 미국 드라마 <매드맨>으로 대표되는 기름진 레트로 가르마도 다시 성행한다. 이러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가발풍 헤어스타일이 다시 자리 잡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러고 보니 그쪽엔 케니 G라는 파이오니어가 있다.
그나저나 왜일까? 왜 갑자기 남자의 머리 위에서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날까? 기사는 인스타그램 효과가 크다고 분석한다. 인스타그램이 대중화되면서 보통 사람들이 특정 헤어스타일의 이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말 된다. 스마트폰은 카메라+뷰어이기도 하다. 따라하고 싶은 머리 모양을 찍어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헤어스타일 레퍼런스를 지금처럼 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대는 유사 이래 지금이 처음이다.
남자의 복식은 스타일보다는 예의의 영역에 더 가까웠다. 여자 옷은 ‘디자이너’가 만들고 남자 옷은 ‘테일러’가 만들었다. 여성화 디자인은 패션 대학교에서 배우는 반면 남성화 제법은 기술학교에서 배우는 식이었다. 머리모양 역시 2주에 한번 면도하듯 다들 똑같이 잘랐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치장은 무척 즐거운 일이고 스타일 산업은 그 쾌감을 탁월하게 자극한다.
남성 헤어스타일 산업의 확장은 오늘날의 남자들이 꾸밈의 세계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지표다. 치장은 청결처럼 한번 익숙해지면 뒤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그건 여자들이 평생 남자보다 한 시간쯤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고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21세기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의 소소한 고충을 알아간다. 남성용 손톱 손질이나 음모 스타일링이 대중화된다면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겠지.
월간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