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될건 또 뭐람
런던에서 차로 두 시간쯤 떨어진 요빌에 있는 왕립 영국 해군 항공 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다. 비행기나 전쟁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것이 재현된 군인들의 옷차림이었다. 20세기의 군인은 전쟁 중에도 타이를 맸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항공모함의 승무원도, 심지어 폭격기 조종사도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고 비행기를 몰고 나갔다.
그때의 타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목에 감겨 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긴 의복은 효율이 아니라 습관의 영역이다. 16세기의 셔츠는 속옷이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서양 남자가 모자를 쓰지 않고 외출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엔 전투기 파일럿도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맸던 것이다. 요즘은 여객기 파일럿만 타이를 맨다. 전통적인 남성복을 이루는 요소는 간소화되고 있다. 이제는 타이를 매지 않는 비즈니스맨도 많다.
타이가 단순히 격식만을 위해 쓰이던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타이는 남자 정장의 일탈이 될 수도 있었다. 오스왈드 보탱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출근길에 빨간 정장을 입을 수는 없다. 솔직히 정장은 줄무늬만 진해도 야해 보인다. 타이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빨간 타이 쯤이야 보통 회사의 과장님이 맬 수도 있다. 멀리서 보면 무슨 무늬인 줄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면 동물이 수백 마리 인쇄된 타이도 있다. 뭐, 가끔 그런 것쯤 매도 아무 상관 없는 게 남자 정장의 은은한 매력이다.
멋부리기는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인간의 유구한 본능이다. 본능이 쉽게 사라질 리 없다. 누군가에게 타이를 매지 않는다는 건 보통 남자가 일상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은근한 멋내기 기회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어떤 남자들은 목을 지나 발목으로 눈을 돌렸다. 양말의 시대가 온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즈> 2월 20일 주말판에는 '양말 시장이 큰다'는 기사가 실렸다. "(양말 시장 확장의)촉매는 패션 브랜드들의 관찰에서 왔습니다. 사무실에서 아무도 타이를 매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양말이 희미하게 개성과 색을 드러내는 액세서리가 된 겁니다." 기사에 소개된 '런던 삭 컴퍼니' 대표 라이언 팔머의 말이다. 런던 삭 컴퍼니의 비즈니스 모델은 일종의 양말 정기구독 서비스다. 한 달에 10파운드(약 18000원)부터 내기 시작하면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곳으로 양말을 배달해 준다. 어떤 양말을 고를지는 인터넷으로 정하면 된다. 이 회사의 대표들도 패션이 아니라 테크 업계 출신이다. 실로 21세기적인 서비스다.
한국은 어떨까. 신사복의 수도 중 하나인 런던과의 단순 비교는 무리겠지만 한국 남자들도 점차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중이다. 다양한 편집 매장에서 새로운 양말 브랜드를 수입하거나 출시하고 있다. 양말 취미는 쓸모없이 세세한 데 관심을 쏟는 남자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 어떤 기계로 짰는지, 앞부분의 봉제는 어떤 식으로 마무리해서 발에 얼마나 편한지, 이런 요소를 통해 나와 잘 맞는 양말을 찾아보는 것도 21세기의 소소한 재미 아닐까. 그나저나 <파이낸셜 타임즈> 기사에 언급된 양말은 아래와 같다. 미국의 스탠스, 스웨덴의 해피 삭스, 일본의 타비오와 춥.
월간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