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통찰과 수다

보석과 가치와 욕망의 균형감각

by 박찬용
41lkgxbMzSL._SX323_BO1,204,203,200_.jpg


<보석 천 개의 유혹>은 상반기 최고의 책 5선 안에 든다. 올 하반기도 이제 다섯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이 추세라면 올해 가장 재미있었던 책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엔 다양한 사례와 탄탄한 논지가 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주제가 있는 동시에 너무너무 속물적으로 못돼서 재미난 비유와 표현도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맛있는 커피나 차는 단맛부터 쓴맛에 이르는 다양한 맛이 겹쳐진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각각의 맛이 모여 뭐 하나도 빼내면 안 될 정도의 묘한 밸런스가 완성된다. 나는 이 책에도 다층적인 재미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입체적인 맛이 나는 묘한 밸런스의 글을 만들고 싶지만 잘 안 되던데…나의 슬픔은 넘겨두고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책의 원제는 <STONED>다. 보석을 ‘스톤’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보석류를 말할 때 흔히 쓰는 쥬얼jewel을 쓰지 않은 걸 보면 원제를 지은 사람들은 좀 더 중의적인 의미를 의도한 것 같다. stoned라는 말에는 ‘(약 등으로)정신이 나갔다’는 뜻도 있다. 그 말처럼 이 책에는 보석이 초래한 정신 나간 결정도 많이 실려 있다. 보석이 뭐길래 사람들은 이 돌stone 때문에 정신 나간 짓들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을 이끄는 이야기는 인류가 보석 때문에 해온 일들이다. 다양한 시간과 장소의 일들은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처럼 흥미롭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유리구슬 몇 개에 맨해튼 섬을 넘겨준다. 에스파냐는 에메랄드를 구하려 남미를 무자비하게 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통념과는 달리 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산 적이 없다. 영국의 왕비 자매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진주 목걸이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수많은 사람이 보석으로 영광을 얻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보석 때문에 목이 날아간다. 각자의 이야기들은 좋은 옷의 소재처럼 훌륭하지만 좋은 옷감만으로 좋은 옷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좋은 디자이너처럼 훌륭한 작가가 필요하다.


에이자 레이든이라는 사람이 이 흥미로운 책을 만들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고대사와 물리학을 전공했고 옥션하우스인 하우스 오브 칸의 경매 담당을 거쳐 보석 회사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이다. 이 경험을 배경 삼아 그녀는 보석의 역사를 훌륭하게 자기화시켰다. 여기서의 자기화란 이런 것이다. 역사를 배운 사람답게 사건에서 맥락을 찾아내는 데 능하고 과학적 사고를 익힌 사람답게 과학적 데이터로 논지를 쌓을 줄 안다. 보석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수도승처럼 검박한 사람은 아니다(내 직종도 그렇고, 경험상 물질세계에 초연한 사람은 애초부터 이런 직종을 지망하지 않는다). 즉 보석도 화려한 것도 좋아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다. 덧붙여 타고난 재치도 있다. 그 결과 이 책에는 돌려볼 때마다 다른 반사광을 내는 보석처럼 묘한 매력이 생긴다.


에이자 레이든은 저녁식사 화제로 끝날 수도 있는 에피소드 아래로 깊은 철학적 문답을 깔아 두었다. 그 문답의 화두는 가치와 욕망이다. 우리는 왜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가,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물건의 어떤 가치인가, 가치는 원래 거기 있는 것인가 혹은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인가, 가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가 혹은 달걀 껍질처럼 연약하고 파도처럼 계속 흔들리는가, 가치가 연약하고 늘 변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는 왜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가. 그 중에서도 왜 보석처럼 실생활에 무용한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가.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재미있다는 게 <보석 천 개의 유혹>이 정말 훌륭한 부분이다. 에이자 레이든은 친구 결혼식 피로연 테이블에서 우연히 만난 너무 재미있는 여자처럼 보석이라는 소재로 별 이야기를 다 끌어 온다. 그녀는 역사를 말하고 욕망을 말하며 가치의 탄생과 형성과 보존이라는 경제적/형이상학적 이야기를 말하며 인간의 욕망을 연구한 과학적 실험 자료를 말하는데 그 사이로 농담도 계속 끼워 넣는다. 미친 듯이 파티를 여는 어릴 때의 마리 앙트와네트를 ‘신용카드만 손에 쥔 불행한 십대 소녀’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가십 걸에 나오는 것 같은 누나가 불경한 비유를 섞어 가며 엄청나게 똑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앞에는 돔 페리뇽 같은 걸 한 잔 따라 두고.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질문과 비슷한 궁금증을 느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기도 했다. 나도 좋은 물건을 다루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업계에서 일하며 점점 궁금해졌다. 이 물건이 왜 좋을까? 비싸서? 그러면 왜 비쌀까? 왜 똑같이 비싼 물건 둘 중 하나만 잘 팔릴까? 그런 궁금증과 나름의 미숙한 답이 섞인 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멋지게 답을 냈다.


<보석 천 개의 유혹>은 보석을 소재 삼지만 사실은 가치에 대한 성찰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물건에 가치가 붙는다는 것, 즉 가치 앞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하거나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에 대한 성찰이다. 뭔가를 가져 보겠다고 아등바등하고 마음 졸이고 줄 서고 뛰고 할부를 끊고 잔고를 확인하고 돈을 빌리는 등의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일들을 하며 ‘대체 내가 뭐에 홀려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방금 말한 건 나도 다 해본 일이다. 그게 이 책이 재미있었던 진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실로 정말 재미있어서 책을 다 읽자마자 에이자 레이든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트위터 계정이 있길래 “정말 재미있었어요. 님 책 너무 좋아요”라고 멘션을 보냈습니다. 사실 사진을 보니 좀 무서운 누나같아서 영어도 서툰 아시아인에게 답을 줄까 싶었는데 “고마워요”라는 답 멘션을 받았습니다. 용기를 내서 “메일 주소 좀 알려주면 안 될까요,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며칠 후에 메일이 왔어요. 이러저러해서 메일이 조금 늦었고 재미있게 봐 줘서 고맙다는 예의 바른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더 용기를 내서 “님 책 너무 재미있었고 너무 좋아서 그러는데 서면 인터뷰 좀 하면 안 되나요” 라고 메일을 보냈는데 거기엔 답이 없었습니다. 그럴 만 하지, 생면부지의 외국인과 인터뷰라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 답이 왔지 뭐에요. 이러저러해서 바빴고 인터뷰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터뷰 질문을 진작 보냈어야 하는데 회사 일이 바빠서 조금 시간이 걸렸네요. 이제 인터뷰 질문지를 보내려 합니다. 이 글이나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신 분이라면 이어질 에이자 레이든과의 인터뷰도 기대해 주세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팝을 향한 시선”의 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