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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16. 2016

허대리의 16시간_01-02

추석특집 SF소설


01

HMD를 풀자 허대리의 현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허대리가 사는 곳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90만원인 초소형 오피스텔이었다. 2027년의 서울 시내권에서 이 정도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오피스텔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허대리는 이곳을 찾아내기 위해 꼬박 6개월 동안 퇴근하고 나서 온 서울을 다 돌아다녀야 했다. 겨우 구한 오피스텔의 생활 수준은 C- 정도라고 봐야 했다. 풀옵션 원룸이라고는 했지만 풀옵션을 이루는 전자기기는 하나같이 구형이었다. 냉장고는 터치스크린도 달려있지 않았다. 소형 드럼 세탁기에는 구형 무선통신 기술인 블루투스 기능밖에 없어서 섬유유연제를 넣으려면 귀찮게 세탁기 앞까지 가야 했다. 방이 워낙 좁아서 세탁기 앞에 가는 건 큰 문제가 없었지만 TV에 나오는 신형 세탁기를 볼 때마다 허대리는 서글퍼졌다. 신형 세탁기는 자동 세제 구입 기능과 음성 인식은 물론 현대인의 불안을 해소하는 음성 인생상담 소프트웨어까지 들어 있었다.



방금 푼 건 허대리가 잘 때 쓰는 수면용 VR이었다. 허대리의 오피스텔 면적은 2.5평 정도에 불과했다. 창문을 열어봤자 보이는 건 옆 오피스텔의 창뿐이었다. 오피스텔 특유의 도저히 끌 수 없는 공조기 소리도 계속 들렸다. 월세가 싼 방이어서 집과 공조기도 너무 가까웠다. 허대리는 스스로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이 곤두선 날이면 공조기와 냉장고 소리가 들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달 전에 야근하며 짜증을 참을 수 없던 어떤 날에 허대리는 카드사 5개월 무이자 할부로 맞춤 VR 안대를 하나 사고 말았다.



맞춤 VR 안대는 보통 안대보다 조금 두껍게 생겼고 귀쪽 부분도 좀 두텁다. 뒤쪽에 신축성이 있는 스폰지를 끼워 얼굴에 딱 맞는다. 앞부분도 얼굴형에 똑같이 맞춰 만들어져 일단 쓰면 눈 앞의 빛이 모두 차단된다. 맞춤형이라는 건 그 회사에서 아주 강하게 내세우는 마케팅 포인트이기도 했다. 눈 앞의 빛을 모두 차단시키면 진짜 실감나는 VR 영상을 즐길 수 있다고. 허대리가 이 맞춤형 VR을 산 가장 큰 이유 역시 이것이었다. 잘 때만이라도 마음에 드는 현실-아니, 현실 비슷한 것과 마주하고 싶었다.



결제를 마치자마자 라인카카오 메신저를 통해 바로 HTCTR VR(오트쿠튀르 VR)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라인카카오 메신저는 라인과 카카오가 2020년에 전략적 제휴를 목적으로 합병한 새로운 서비스다. 둘은 어디의 이름을 앞에 둘까를 놓고 5개월 동안 싸우다가 홀수 해엔 라인카카오, 짝수 해엔 카카오라인으로 쓰기로 했다. 홀수 해에는 앱스토어에서 ‘카카오라인’이라고 검색하면 아예 결과가 안 뜨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한국의 큰 회사들이 그렇듯 라인카카오/카카오라인은 소비자들의 작은 불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어도 HTCTR VR을 만들어서 받기 위해서는 최소 1회의 오프라인 미팅이 필요했다. 안대가 감기는 얼굴 앞부분의 골상을 파악하려면 실제로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대리는 오트쿠튀르라는 단어의 어감만큼 대단한 서비스를 기대했다. 골상 장인이 올까? 아니면 이를테면 몇 년 전 <007>에서 벤 위쇼가 연기한 Q처럼 최신 트렌드에 밝은 느낌의 청년이 올까?



둘 다 아니었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점심 시간에 만난 HTCTR VR의 3D 페이스 스캔 담당자는 왠지 수상한 느낌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앉아 있었다. 허대라와 마주 앉은 그 젊은이는 가방도 없이 왔다. 그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소형 헤어스프이같이 생긴 걸 꺼내고 2024년판 갤럭시 XYZ 14에 끼웠다. 스마트폰에 연결하는 3D 스캐너였다. 그는 허대리의 얼굴에 모기약을 뿌리는 느낌으로 3D 스캐너를 허대리의 얼굴에 1분쯤 이리저리 갖다 댔다. 이렇게 한다고 뭐가 된단 말이야? 싶을 때 그는 “다 되셨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HTCTR VR은 3D 페이스 스캔이 끝난 이틀 후에 로젠택배로 와 있었다.



도착한 HTCTR VR은 기분 나쁠 정도로 몸에 잘 맞았다. 차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너무 안 보여서 자기 전에 문단속을 꼭 하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페이스 스캐닝의 엄청난 완성도와 수상한 젊은이를 함께 떠올리며 허대리는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눈빛이 멍한 20대 청년이 손만 잠깐 까딱거려도 지난 세기의 최고급 장인들이나 할 수 있던 수준의 스캐닝을 해낼 수 있었다. 허대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었다.



HTCTR VR은 정착 단계에 접어든 HMD 기반 VR 영상 재생 기기 중 수면과 휴식에 중점을 뒀다. 전자파를 최대한 덜 내는 기술을 적용해 잘 때도 편안하게 두르고 잘 수 있다는 것이 HTCTR VR 측의 설명이었다. 배터리 재생 시간은 10시간. 주중에 잘 때 쓰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케이블을 연결하거나 무선 통신으로 접속해서 본사 홈페이지에서 휴식하기 좋은 영상을 20000개 정도 바로 볼 수 있었다. 이어밴드 부분에서는 알아서 음악도 흘러나왔다. 허대리가 아침에 본 영상은 다양한 검색과 설정 모드 중 허대리가 ‘파랑’ ‘은은한’ ‘재즈’를 틀었을 때 HTCTR VR사이트의 알고리즘으로 자동으로 찾아낸 영상이었다. 자신이 본 곳이 어디인지 허대리는 몰랐다. 사실 큰 관심도 없었다. 허대리는 평생 그곳에 가볼 일이 없을 것이다.



허대리는 잠에서 반쯤 깨어 자신의 너무 좁은 방과 방금 본 너무 넓은 바다 사이의 간극을 메꾸려 잠깐 시간의 흐름을 더듬었다. 휴, 그래, 그랬지. 내가 그래서 그 영상을 본 거였구나. 세상에는 저렇게 맑고 푸른 바다가 있겠지? 내가 언젠가는 그 곳에 가볼 수 있을까? 내가 본 바다라고는 강화도의 갈색 진흙 바다뿐인데? 아냐. 출근해야 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허대리는 잠깐 고개를 젓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21세기든 뭐든 9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




02


허대리는 서울지하철 14호선을 타고 출근한다. 5호선과 14호선 환승역인 광화문역에서 내린다. 서울의 땅부자들이 이 도시의 땅값을 어떻게든 유지시키는 데 성공해서 사람들은 아직도 서울에 많이 살았다. 14호선의 노량진-광화문 구간은 9호선의 염창-종합운동장 구간처럼 서울에서 가장 많이 붐비는 구간 중 하나였다. 자동차도 커지고 사람의 평균 신장도 커졌지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단위 면적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허대리는 집에서도 출근길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늘 어딘가에 치여 사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허대리는 14호선 노량진역의 급행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번 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럽에 달라붙은 개미 떼처럼 사람이 많았다. 내가 저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니. ‘나도 남들이 보기엔 저 인파 중 하나일 뿐이겠지’ 허대리는 체념하며 인파에 몸을 맡겼다. 그래도 구겨진 색종이처럼 7분만 끼어 있으면 광화문역에 내릴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기 위해 허대리는 재킷 안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스노보드 고글과 테 굵은 선글라스의 중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애플에서 4년 전 발표한 애플뷰 에어 3였다. VR 영상을 보여주지만 머리에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막힌 안경 형태로 영상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애플은 이걸 HMD가 아니라 눈 앞에서 보여준다는 뜻의 OED(On Eye Display)라고 불렀다. 스티브 잡스의 생전을 기억하는 나이 든 애호가들은 ‘스티브 잡스라면 이렇게 알아듣지 못할 느낌의 약어를 쓰지 않을 것’이라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애플의 제품이 으레 그렇듯 물건은 아주 잘 팔렸다.



허대리는 애플뷰를 쓰고 잠시 현실을 잊었다. 애플뷰 에어 3에는 어제 보다 만 영화가 흘러나왔다.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매트릭스>라는 영화였다. 며칠 전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자신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라면서 추천해 주었다. 그녀는 좀 특이했다. 디지털 기기가 사람의 상상력을 저해한다나, 사람의 판단력을 흐린다나. 허대리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묘한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몇 달 전 HTCHR VR 을 샀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우선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허대리는 영화나 소설을 거의 보지 않아서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찾는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매트리스? 웨이트리스?



막상 본 영화도 크게 재미가 없었다. 슬로우모션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는 기법이 당시에는 꽤 파격적인 촬영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4년 전에 나온 아이폰 8S 플러스 세 대만 있으면 바로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뒷목에 케이블을 박고 가상 세계를 굴리기 위한 노예로 쓰인다는 설정도 영 말이 안 됐다. 노예들이 움직여야 돈을 쓰고 노예들이 돈을 써야 거대기업이 성립하는데. 허대리는 사람 사이에 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4호선 급행열차 안에서 애플뷰 에어 3의 영상을 틀어둔 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지하철 안에서 허대리처럼 애플뷰를 끼고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모두 각자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을 잠깐 피하고 있었다. 과음한 사람처럼 승객을 토해내는 지하철에서 허대리는 겨우 나와 사무실에 도착했다.



허대리의 팀원은 허대리를 포함해 7명, 지금 보니 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막내가 먼저 출근해 있다. 사무실 문 앞에 작업모 진열장처럼 생긴 걸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 걸이는 개인용 HMD 슬롯이었다. HMD는 출근할 때 빼고 퇴근할 때 걸어둔다. 걸어두기만 하면 충전과 소프트웨어 업로드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데이터가 한 곳에 들어 있으므로 HMD를 사무실 밖으로 반출하지 않으면 데이터 보안도 문제없다. 물론 이건 기업용 HMD를 만들어 보급하는 사람들의 논리였다. 외부에서 사용하는 구글-마이크로소프트 클라우드 기반 소프트웨어와 기업용 MHD 보안 프로그램은 충돌이 꽤 심했다. 하지만 서부간선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교통정체에 익숙한 것처럼 2027년의 회사원들은 회사 컴퓨터의 충돌에는 꽤 익숙해져 있었다.



허대리는 자신의 HMD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HMD라는 개인용 모니터를 쓰고 있었다. 회사를 좋아서 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인사는 상쾌하게 해야지. “안녕하세요.” 라고 할 수 있는 한 싱그럽게 말해봤지만 허대리의 목소리는 힘없이 뻗다 말았다. “네 안녕하세요.” 허대리와 비슷한 정도로 생기 없는 목소리들이 대답했다.




경영 월간지 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SF 단편소설 <허대리의 16시간>을 연재합니다. 본격 SF소설이라기보다는 농담 반 근미래소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9월 15일 추석부터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까지, 매일 밤 10시-11시 사이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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