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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17. 2016

허대리의 16시간_03-04

추석특집 SF소설



03

허대리는 HMD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허대리의 자리 폭은 약 80cm 에 불과했다. 책상 위에 올려둘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것만으로도 문제없었다. HMD는 사무실의 개인용 모니터 역할을 완전히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용 컴퓨터 모니터는 처음엔 뒤가 긴 CRT 모니터였다가 뒤가 얇아진 LCD 모니터로 대체되더니 하나둘씩 HMD가 개인용 모니터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업주 입장에서 가장 큰 장점은 사무직 직원의 1인당 면적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무실에서 10개의 사무실 책상을 두는 면적이라면 HMD로 대체했을 경우엔 17개 정도의 책상을 둘 수 있었다.



20세기의 직장인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허대리의 사무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가린 헬멧 같은 걸 쓴 채 바닥에 손가락을 비비고 있었다. HMD 모니터의 입력 장치인 키넥트 패드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키넥트 패드는 와콤과 마이크로스프가 함께 만든 신개념 입력장치다. 엑스박스라는 콘솔 게임기에 쓰던 키넥트 기술과 와콤의 태블릿 기술이 함께 적용된 패드로, 사각 고무판 위쪽 끝에 불룩한 센서가 놓여 있는 모양이었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터치패드와 3차원 스와이프를 통해 좀 더 복잡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했다. 허공으로 스와이프를 하면서 화면을 넘기다가 화면을 확대하려면 터치패드에 손가락을 벌리는 동작을 취하면 된다. 키보드를 쓰고 싶으면 키넥트 센서에 대고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하면 된다. 아까 허대리에게 대충 인사한 사람들은 모두 HMD를 띄워두고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손가락이 책상을 비비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HMD와 키넥트 패드와 맞물려 사무실에는 선이 없어졌다. 대부분의 기기 충전과 데이터 통신은 무선으로 이루어졌다. 키넥트 패드는 AA 배터리 3개만 넣으면 3개월쯤 지속되고 개인용 HMD는 홀더에 꼽아 두면 한 시간 만에 50%쯤은 충전된다. 퇴근할 때나 점심시간에 거치해두기만 해도 몇 시간쯤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신 어떤 사람들은 전자파 음모론 같은 걸 말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 피곤한 건 엄청난 양의 무선 충전과 통신 장치들이 내는 전자파 때문이라고. 하지만 모두 사무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이 일했기 때문에 그 말을 검증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허대리는 먼저 사무실에 온 사람들을 한번 더 쳐다보았다. HMD식 모니터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대신 완벽한 사생활 보호를 구현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윤선민 부장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보길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는지는 실제로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었다. HMD 모니터에는 홍채 인식 기능이 있어서 사용자의 눈이 아니라면 어떤 영상도 켜지지 않았다.



HMD 모니터 도입 초기에는 스릴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사무실 안에서 포르노를 본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모두 눈을 가렸으니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여자들은 실제와 무관한 이 소문에 격분했다. 여자들은 그때부터 사소한 오해라도 줄이기 위해 얼굴이 상기된 느낌을 주는 볼터치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HMD 모니터 이후 볼터치 화장품의 매출이 폭락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아직도 뷰티 업계에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허대리는 사무실의 여성 직원을 힐끗 보며 이런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도 <매트릭스>를 알려준 소개팅의 그녀가 해준 이야기다. 그녀는 “가상현실은 현실의 반대가 아니라 현실의 기묘한 일부분이야. 그 사실을 알아야 사람들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묘한 말을 했다.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어려운 말만 하는 거지? 그녀도 그녀만의 사무실 HMD 모니터에 포르노를 띄워둔 적이 있을까? 내게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걸까? 나를 자극하는 걸까?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허대리는 힘이 빠진 채 잠깐 쓸데없는 딴 생각을 했다. 직장에 늦지 않게 도착한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하루치 에너지의 70%를 쓰는 유사 이래의 모든 직장인들처럼.



하지만 우리의 허대리는 꽤 유능하다.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HMD 모니터 속 업무로 뛰어들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답을 보내고, 외부에서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는 동시에 다른 곳으로부터 자료를 요청했다. 바깥에서 보는 허대리의 모습은 허리가 상할 것 같은 자세로 사무용 의자에 길게 앉은 피아니스트 겸 판토마임 퍼포머와 비슷했다. 모니터 속의 그는 트랙의 베스트 랩을 노리는 F1 드라이버처럼 뇌를 최대한의 속도로 구동하며 일을 진행시켰다. 외부의 시각적 자극을 차단하는 HMD는 업무 효율에 아주 좋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되었다. 물론 그 조사는 업무용 HMD의 제조사들로부터 나온 풍족한 연구 비용의 산물이었다.



사무공간이 줄어들고 모니터가 바뀌었어도 직장인들은 여전히 점심을 다같이 먹는다. 미팅이 있던 두 명을 빼고 윤선민 부장을 따라 모두 바깥으로 밥을 먹으러 나왔다. 윤선민 부장 아래에 있는 이민태 차장은 말이 많고 남에게 훈계하는 걸 좋아한다. 그는 오늘도 너무 매운 순두부찌개를 앞에 두고 HMD가 없던 시절의 직장생활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예전에는 사무실에 가면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타닥타닥 났어. 너희들 기계식 키보드라고 알아? 전자식으로 입력 신호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실제 버튼으로 신호를 줘서 글자를 띄우는 거야. 기계식 키보드만의 손맛이 어땠는지 너희들은 모를 거다. 아날로그의 맛이란.”



아날로그 같은 소리,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허대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압도적으로 편안한 기술 앞에서 굳이 불편한 아날로그를 찾으려면 남는 자원이 꽤 많아야 한다. 키넥트 패드가 대중화되자 기계식 키보드의 손맛 같은 걸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취를 감췄다. 한때의 LP 플레이어처럼 기계식 키보드는 기술이 아니라 심미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허대리도 한때 기계식 키보드를 사볼까 싶어 찾아본 적이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싼 데다 불편해서 그만뒀다. 요즘 제대로 된 기계식 키보드는 100만원이 넘는다. 에르메스의 가죽을 씌운 489만원짜리(부가세 별도) 기계식 키보드도 있다. 이민태 차장이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 때 애플뷰 에어 3을 끼면 참 좋을 텐데, 라고 허대리는 생각했다.



그래도 바깥에서의 점심 시간이 주는 기쁨은 이민태 차장의 훈계가 주는 짜증보다 훨씬 컸다. 말 그대로 하루에 8시간씩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으려니 허대리는 점점 바깥에 나갈 수 있는 점심시간이 절실해졌다. 허대리만의 고충이 아닌 모양인지 광화문 인근의 식당 중 지하 식당은 거의 문을 닫았다. 지하 식당은 개인용 VR을 설치한 1인용 식당이 주를 이뤘다.



대신 바깥이 보이는 유리창이 큰 식당, 마당이 있는 식당, 노천 테이블이 있는 식당의 인기가 굉장히 높아졌다. 덕수궁과 경복궁 역시 점심 시간만 되면 버스 환승 센터처럼 붐볐다. 점심을 거르고 자연의 초록을 보겠다면서 고궁을 걷다 오는 직원들도 많았다. 사실 그건 재미없는 중년 남자 상관들과 점심을 먹기 싫은 여성 직원들이 가장 쉽게 대는 핑계이기도 했다. 허대리 역시 후딱 밥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푸른 잎을 보고 싶었다. 그는 이민태 차장을 따돌리고 잠깐 조계사를 걷고 왔다. 집계해봤을 때 허대리가 그나마 자연 비슷한 것 사이에서 머무는 시간은 하루에 3분 내외였다.




04

오후 시간. 개인용 HMD 모니터의 또 다른 장점은 졸릴 때 잠깐 잠들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물론 화장실을 오가거나 회의를 할 때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완전히 졸 수는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시야를 완전하게 가린 채 일하는 대도시의 문화가 확립된 것이었다. 허대리는 이 역사적인 흐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냐 하면…여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대리는 프로그램을 몇 번 스와이프해 넘겨서 띄운 라인카카오 메신저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보라고 한 매트릭스 너무 어려워’


허대리는 여기까지 메시지를 보내고 이제 198개로 늘어난 카카오 친구 중 오리너구리인 ‘덕구리의 하루’ 이모티콘을 보냈다. 어려운 보고서 앞에서 엉엉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었다. 메시지 옆에 있던 1자가 금방 없어지고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그녀도 아직 허대리가 마음에 있는 모양이다.



‘매트릭스는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우화야. VR과 MHD로 대변되는 가상현실적 체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발현이기도 하지.’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 그게 뭐지? 허대리는 이렇게 어려운 말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걸 모른다고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의 화제를 만들기 위해 영화를 본 것뿐이다. 어차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면 된다.



사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그녀의 흰색 얇은 티셔츠 안으로 보이는 검은색 브래지어였다. 그 검은색 브래지어 안에 들어 있는 걸 볼 수 있다면 시뮬라르크든 시뮬라시옹이든 공부할 수 있다. ‘우선 이 핑계로 한번 더 만나면 되잖아. 매트릭스는 3까지 나왔던데 하나 보고 한 번 만나면 앞으로 세 번은 더 만날 수 있어.’ HMD 모니터 아래로 드러난 허대리의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HMD라는 첨단 기술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허대리의 근본적인 욕구는 주변의 모든 암컷에게 추근덕거리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원래 기를 써서 시간 맞춰 출근하고 ‘으 피곤하다’고 잠깐 생각하다 점심 먹고, 점심 먹고 나면 잠깐 졸았다 주변 사람과 수다 떨다 보면 해가 지는 게 직장 생활이다. 2027년의 어느 목요일도 그렇게 다를 바 없이 지나갔다. 윤선민 부장도 이민태 차장도 모두 눈 앞을 가린 개인용 HMD를 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허대리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모니터 속의 세계에 하루 종일 빠져 있다 HMD를 벗으면 고개를 돌리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자신의 자리가 눈 앞에 들어왔다. 책상의 앞은 가슴을 대고 일할 수 있도록 가슴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스위스 시계공의 책상에서 영감을 얻은 사무용 가구 제작자 김정환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이 아이디어로 사무직 직원의 사무실 내 1인당 면적을 5% 줄이는 데 성공해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그는 아주 큰 개인용 책상이 놓인 사무실을 차렸다.



경영 월간지 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SF 단편소설 <허대리의 16시간>을 연재합니다. 본격 SF소설이라기보다는 농담 반 근미래소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9월 15일 추석부터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까지, 매일 밤 10시-11시 사이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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