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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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다시 인파를 뚫고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비슷한 업무, 출근길보다 조금 더 지치는 퇴근길, 애플뷰 3 에어로도 가려지지 않는 인파의 기분 나쁜 열기와 남자들의 땀 냄새(애플뷰 5 에어를 사면 좀 나아질까?), 이런 것들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도 허대리를 기다리는 건 2.5평짜리 오피스텔 방뿐이었다. 인생상담 기능이 없는 구형 세탁기와 터치스크린이 설치되지 않은 구형 냉장고가 있는. 허대리는 ‘내가 꿈 꾸었던 도시 생활이 이런 걸까’라고 잠깐 생각했다. 그가 잠깐씩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길게 생각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27년의 서울엔 길게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주 적어서 아무도 허대리를 탓하지 않았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허대리는 저녁 약속 잡는 걸 깜빡 했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야 깨달았다. 에이, 뭐. 이미 늦었으니까 허대리는 씻고 방으로 나왔다. 어차피 친구가 없어도 허대리에겐 음악이 있다. 음악 감상은 허대리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유일한 사치였다. 허대리는 좋은 사운드시스템을 이용해 훌륭하게 녹음된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일을 무척 좋아했다. 좋은 오디오는 넓은 면적을 요하고 무겁고 비싸서 허대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취미가 되었다. 활로를 넓히려는 오디오 업체들은 헤드폰 앰프라는 새로운 장르의 변종 하이엔드를 만들어냈다. 좋은 헤드폰 앰프와 헤드폰을 쓰면 평범한 음악 애호가에겐 분에 넘칠 정도의 좋은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허대리는 이유 없이 지치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영풍문고에서 들려온 피아노 소리에 홀린 듯이 이끌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듣기 시작했다. 바흐의 세계 안에서는 어떤 혼란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이유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현실과 가상, 물리적으로 점점 좁아지는 허대리의 세계와 너무 넓어지는 부자들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면 뭔가 굉장히 균형 잡힌 것이 필요했다. 허대리는 이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조리 있게 설명한 적이 없었지만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는 것처럼 균형 자체를 찾다 바흐까지 갔다. 그는 잠깐 눈을 감고 베이어 다이나믹 T90이 들려주는 바흐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로잘린 투렉이 연주한 파르티타를 좋아했다.
음으로 표현된 균형 사이에서 허대리는 잠깐 잠들었다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전 입주자가 담배를 많이 피워서 누렇게 변색된 좁은 오피스텔 천장뿐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허대리는 조용히 자신을 타일렀다. 현실은 담배 연기로 누래진 벽지 같지만 적어도 비현실에서는 더러운 벽지를 보지 않아도 돼. 그는 조용히 침대에 눕고 아침에 충전시켜 둔 HTCTR VR을 머리맡에서 끌어와 눈 주위에 감았다. ‘가만 보자. 어제 본 건 파랑, 은은한, 재즈였지. 오늘은 초록색이 보고 싶어. 은은한 것보다는 좀 더 생기 있는 소리를 듣고 싶어. 재즈 말고 클래식을 들을래.’ 허대리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초록, 생생, 클래식을 맞춰 두고 영상을 기다렸다.
눈 앞에 아주 푸른 침엽수림이 펼쳐지고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현악 오케스트라가 들려왔다. 허대리는 두 눈을 가리고 모니터로 나오는 숲을 바라보며 조금씩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낮은 음색의 친절한 목소리가 허대리의 귀에 울렸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네요. 잘 견뎠어요. 잘 자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하고 푹신한 잠이 허대리를 감싸고 자신의 세계로 끌어내렸다.
지금까지 경영 월간지 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SF 단편소설 <허대리의 16시간>이었습니다. 본격 SF소설이라기보다는 농담 반 근미래소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몇 분이나 읽어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분이라도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그만한 보람이 없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연휴 보내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