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0번 카드. 바보
아무튼, 시작
새로운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설렌다. 설레고 두렵다. 놀라기 싫으면서도 놀라고 싶어 공포영화를 볼 때의 기대감과 비슷하다. 신나서 아랫배가 뭉친다. 모임 첫날, 도망치고 싶은 심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기어갔더니 지각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톤이 높아져서 목소리가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다. 원래 말을 잘 못한다는 말마저 못 해서 아무 말이나 해보다가 말을 잘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들키지 않고 낯을 가리기 위해 책장 위 공룡 인형들을 구경했다. 아, 수룡이 되고 싶다.
새로운 것들을 힘들어하면서도 나는 ‘시작’ 덕후다.
‘시작’이라는 낱말이 품은 가능성이 좋다.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걸 이룬 듯 의기양양해진다.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그리고 달라질 내가 보낼 시간을 상상하며 설레는 것이다.
박상영 작가님은 ‘오늘 밤은 야식 먹지 말고 자야지’라고 매일 다짐하고 망했던 하루들을 모아 책까지 내셨지. 아직 나는 그렇게까지 성실하고 전문적으로 망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비슷한 과정을 간헐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의 나는, 다음 주의, 다음 달의, 내년의,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나는 굳건한 의지력과 강한 정신력으로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일들을 웃으면서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부터가 새로운 시작,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면이 내 삶에 펼쳐질 것이다.
오늘 저녁은 가볍게 샐러드로 먹어야지. 소스는 조금만. 오늘 저녁에는 꼭 부엌 창고를 정리해야지. 사진 파일들도 한 번 정리해야 하는데. 연말 오기 전에 내년도 계획서도 한 번은 봐야 하고.
그리고 퇴근 후에는 저녁을 양껏 맛있게 먹고는 책 한 권 안고 뒹굴겠지. 부엌 창고는 이사 갈 때쯤 되면 자연히 정리되겠지. 내년도 계획서는 내년의 내가 써주겠지. 아니면 내일의 내가. 용량 어마어마해진 사진들은 이제 모르겠다.
매번 마음을 먹었다 놓았다 하다가 지쳐서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삶의 태도에 관해서도 오래 생각했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시작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굳이 나와 싸우고 달래고 설득하지 않아도 삶은 비슷한 모양새로 흘러갈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 사람들을 위해서 최상급의 내가 되어주고 싶다. 지금보다 조금 더 친절하고 많이 웃고 건강하며 단단한 나. 내일부터는 그래야지. 다음 주부터, 다음 달, 내년, 다음 생일부터는.
일흔여덟 장 중 첫 번째 카드의 키워드는 ‘바보(The Fool)'다. 주인공은 작은 봇짐을 들고 긴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 서 있는 장소에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절벽이다. 옆에서 하얀 개가 짖으며 경고한다. 가지 마, 왈왈. 그러나 떠난다는 설렘에 취한 그에게는 환한 햇살만 보인다.
아끼는 카드다.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면 무슨 일도 겪지 않을 것이나 내내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 또한 비극이 아닐까. 굳이 여행을 떠난 바보는 고생 끝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겠지만, 돌아온 그는 떠나기 전의 그와는 다르다. 이 카드의 또 다른 키워드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이다.
결국 똑같은 자세로 뒹굴게 되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나는 또 바보처럼 다짐해 보겠지. 그러다 요행히 살짝 다르게 살아보는 날도 있을 것이고. 그런 날이 모이면 오늘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