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집착

메이저 15번 카드. 악마

by 시애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은 종종 했었지만, 남들 집에는 있었을 화장실이 없었다. 11평에 방 두 개와 다락과 마루와 부엌과 아궁이와 연탄창고를 알차게 눌러 넣은 아파트에는 베란다와 욕실과 화장실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빨래는 옥상에 널었고, 끓인 물을 빨간 다라이에 부어 쪼그려서 씻었고, 아파트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썼다. 밤에는 내복이나 속옷 바람으로 밖에 나가는 게 부끄럽고 무서웠으므로 잠든 식구들 발밑에 요강을 두고 변기 대신 썼다. 간혹 새벽에 깨어나 요강에 앉으면 제법 높아진 수위 때문에 오줌이 다시 나에게 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낮의 화장실도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온갖 벌레가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곳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는 건 매번 용기를 필요로 했다. 집 안에 있는 변기가 갖고 싶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몰래 화장실을 구경했다. 변기에다 욕조와 샤워기까지 있는 곳. 쪼그려 앉지 않아도 되는 곳.



일을 시작하고 살게 된 울산의 주택도 화장실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2층이 주인집이고, 1층에는 칸칸이 현대중공업 직원들과 내가 살고, 건물과 대문 사이 통로에 공동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중공업 아저씨 엉덩이 체온으로 뜨듯한 변기에 앉으면 무릎과 쇠문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아침마다 머리카락 가득 담배 냄새가 밴 채로 출근했다. 부엌 겸 욕실이었던 공간에 이번에는 벌레 정도가 아니라 쥐가 나왔다. 공동 변기의 지린내가 싫은 날에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누고 물을 부으며 쥐한테 깨물리는 게 아닐까 혼자 몸서리쳤다. 양변기가, 정말이지, 갖고 싶었다.



번 돈을 꼬박 모아 집을 샀다. 낡았지만 그럴싸한 아파트였다. 예쁜 옷, 명품백, 자동차, 피부관리, 최신기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단 하나 갖고 싶은 게 집이었다. 깨끗한 하얀 변기가 있고, 욕조가 있고, 서서 샤워를 할 수 있는 집. 이왕이면 고무 쓰레빠를 신지 않고도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컴퓨터 책상과 데스크탑이 들어갈 공간이 있는 집. 집은 남자가 구하고 살림을 여자가 해가는 거라는 이상한 소릴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당신도 엉덩이 깐 채로 쥐랑 눈이 마주치면 생각이 바뀔걸. 첫 내 집 이후로 몇 개의 집을 더 거쳐 지금 사는 집은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 두 개나 있다. 와, 나는 지금 화장실이 있는 집에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간혹 들면 아직도 히죽히죽 좋다. 짠하고 벅차다.






내가 유달리 집이 절실했다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보면 그게 아닌가 보다. 집값, 집과 관련된 세금, 부족한 집, 더 좋은 집, 새로 지은 집, 부수고 새로 지을 집, 집 없는 사람들, 집이 많은 사람들, 집을 사려고 대출을 받은 사람들, 그 대출을 갚고 있는 사람들, 집 지을 땅, 그 땅에 투기한 사람들에 대한 말들이 모든 곳에 부유한다. 당장 내 집의 가격도 다달이 올랐다. 내가 일해서 번 돈보다 그냥 집에 자리 깔고 누워 자다가 번 돈이 훨씬 더 많다. 기쁜데 허탈하다. 나 아닌 누군가는 걱정하고, 누군가는 후회하고, 누군가는 분노하겠지. 그래서 결국엔 또 집 이야기들을 이어가겠지. 《응답하라 1988》의 대사가 떠오른다.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



내 집 마련을 ‘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도 한참 되었다. 당연해야 하는 것들이 꿈이 되면 생활은 고단해진다.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 하기엔 집은 너무 비싸고, 한바탕 눈물로 잊어버리기엔 집은 삶의 질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의 집 문제에 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해법이 있기는 한 걸까.






메이저 아르카나 15번 카드인 ‘악마’ 카드는 6번 ‘연인’ 카드와 구도와 구성이 비슷하다. 벌거벗은 여자 한 명, 벌거벗은 남자 한 명과 그들을 관장하는 커다란 존재. 거대한 천사 대신 헐벗은 악마가, 여자 뒤의 과일나무와 남자 뒤의 불타는 나무 대신 각기 과일과 불이 붙어 있는 꼬리가 같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사랑이 지나쳐 집착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집착하는 대상이 나의 악마다.



그런데 자세히 보자. 악마는 그냥 그 자리에 험악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 인간을 붙잡고 있지 않다. 여자와 남자 목에 걸린 쇠사슬도 굉장히 헐겁다. 일견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쓱 벗어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면 된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붙잡힌 척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고 믿는 것. 그게 바로 집착이다.



대한민국의 신경을 온통 빼앗아 버린 ‘집’ 악마도 우리가 각자의 쇠사슬을 벗어버리면 절로 퇴치될 것이다. 하지만 벗기 힘들겠지.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적당한 만큼만 사랑하거나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을 견디는 일은 필부필부한테는 거의 불가능하다. 싯다르타조차도 온갖 고생 끝에 다다를 수 있으셨던 경지다. 그래서 우리는 목에 걸린 사슬을 벗지 않은 채로 엑소시스트를 기다린다. 막상 제대로 된 엑소시스트가 나타나 악마를 괴멸시키려 하면 사슬을 단 사람들이 나서서 엑소시스트에 맞서 싸울지 모른다. 잘못된 방식으로 변질되었지만, 집착의 시작은 사랑이었으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화장실 있는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 한다면 나 또한 으르렁거릴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은 안다.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다르지만, 지금의 쇠사슬을 언제든 벗어버려도 된다는 것을 안다. 소비로 굴러가는 사회가 내게 씌우려고 하는 쇠사슬 모두가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언제든 내가 원하면 벗어버려도 된다는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슬은 내 목을 졸라오지 않는다. 내 의지가 주인공이 되면 사슬은 목걸이가 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