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일하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해
스물둘까지, 나는 떡볶이의 힘으로 컸다. 뱃살의 팔 할이 떡이라거나 죽고 싶을 때 떡볶이가 생각나 돌아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떡볶이로 번 돈으로 컸다는 이야기다. 나는 떡볶이집 딸내미였다.
간혹 길을 가다 ‘아침 식사 됩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짠하다. 오후 느지막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오전부터 거쳐야 하는 오만가지 공정을 알기에. 일찍부터 큰 시장에 가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재료를 공수하여 가게까지 실어 오는 것이 첫 순서다. 곧이어 가져온 재료를 씻고 다듬고 요리에 넣을 수 있는 형태로 손질해야 한다. 깍둑 썰고 채 썰고 다진 재료들이 ‘다라이’ 가득 쌓이면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커다란 오이고추를 반으로 가른 후에 불린 당면과 채소를 갈아 만든 ‘속’을 넣던 모습이다. 그 옆에서 내가 넓적한 오뎅(내게는 어묵과 오뎅은 다른 맛이라는 철학이 있다)을 반으로 접어 꼬챙이에 꼬불꼬불하게 서너 개 꽂는 동안 은색 쟁반에는 터질듯한 고추들이 착착 쌓여간다. 곧 고구마와 오징어와 쥐포와 꼬마김밥과 집게발도 튀김 재료로 가세한다. 오뎅 국물을 내고, 김밥과 튀김 재료를 쌓아두고, 순대를 데우고, 어제 청소한 가게를 또 청소하고,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잡다한 일들이 다 끝나야 비로소 셔터를 올릴 수 있다. 그러니 아침 식사를 낸다는 간판을 보면 그려지는 것이다. 새벽부터 종종거리며 해내셨을 일들이.
내가 취직하여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야 엄마는 가게를 정리하셨다. 학창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게 한 것을 오래 미안해하셨다. “그때는 내가 사는 게 바빠서”가 도입부, “장사에 미쳐서”가 후렴구인 사과를 비정기적으로 들었다. 아팠던 나와 같이 있어 주지 못했던, 슬펐던 나를 달래주지 못했던, 심심했던 나와 놀아주지 못했던 모든 시간이 ‘그때는 내가 사는 게 바빠서’를 비켜 가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즐거웠던 날들마저도 ‘장사에 미쳐서’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과의 대상이었다.
학부모 상담 기간에 매년 ‘일하는 엄마’들과 통화한다. 울트라 슈퍼 워킹맘들과는 통화 시간 약속 잡기도 쉽지 않다. 직장에서 10분이 넘게 통화하려면 얼마나 눈치가 보이실까. 게다가 높은 확률로 자녀에게 몹시 미안해하시므로 감정 섞인 통화를 10분 넘게 이어가야 한다. 끝내 우시는 분도 있다. 그럴 때는 조용히 말씀드린다.
“아이에게도 아이의 삶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하셔서 아이가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분명히 있어요.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은 나 또한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않을 자신 같은 건, 없다. 공무원으로서 내게 허락된 육아휴직 기간은 3년. 그 후에는 워킹맘(은 무슨, 보나 마나 워킹데드)의 미래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 매끈하지 못하고 버벅거릴 내가 벌써 미안하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부부의 노후와 아이의 청춘을 감당할 만한 돈이 모이고 나면 직장을 그만둘 수 있으려나. 아이에게 내 눈길과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지나버린 후면 어쩌나.
그러면 나도 ‘그때는 사는 게 바빠서’라는 어구로 우산을 씌워주러 가지 못했던 비 오는 하굣길을 속상해하겠지. 함께이지 못했던 평일 낮의 아이가 무턱대고 그립겠지. 세상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걸, 내가 워킹맘이어서 아이가 깨치는 것도 있다는 걸 아무리 머리로는 잘 알아도 결국 서러워하고 말겠지.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에 대한 미안함으로 뭉친 공동체인지도. 엄마한테 전화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