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나는 너를 사랑할 테니까
"젤리 곰이라고 들어보셨죠?"
네? 정기검진 중에 난데없이 젤리요? 어벙한 표정으로 되묻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이 시기의 태아는 꼭 젤리 곰처럼 보인다고. 초음파 모니터를 다시 보니 과연 귀 없는 하리보 젤리가 거기 있었다. 머리가 몸통만 한 9주 차 흑백 젤리 곰.
아직은 태동도 없고 배도 나오지 않았다. 검진일에 초음파 기기로 질 속을 헤집을 때에야 모니터에 보이는 하얀 형체를 보며 비로소 실감한다. 내 뱃속에 정말로 아기가 있구나. 6주 차 0.5cm, 7주 차 1.5cm, 9주 차 2.5cm의 크기로 크고 있단다. 2.5cm라니, 아직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으면서 머리와 몸통과 팔, 다리가 될 부분을 오밀조밀 갖추었다. 신기해라. 입덧마저 용서할 태세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심장 소리까지 들으면, 항복! 항복입니다! 꼼짝없이 감격할 수밖에 없다. 매번.
초음파 검사의 원리는 박쥐가 물체를 감지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어두운 동굴에서 눈이 퇴화한 박쥐는 시력 대신 청력으로 세상을 ‘본다’. 인간은 초음파 영상 진단기기로 뱃속 세상을 들여다보고 기록한다.
검사가 끝나면 그날의 초음파 사진을 받는다. 검진할 때의 초음파 영상까지 전용 앱에 올라온다. 영상이야 서버 안에 고대로 남겠지만, 흑백 사진은 햇빛과 공기에 오래 노출되면 색이 바랠지도 몰라. 게다가 영수증 두께라 자꾸만 저 혼자 도르르 말린다. 방치하면 도르르 도르르 굴러다니다 버려지겠지.
기념품 집착자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커다란 접착식 앨범을 샀다.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바탕지 위에 사진을 붙인 후에 비닐로 덮는 방식이다. 원하는 크기보다 좀 크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인터넷 쇼핑몰 구매 버튼을 눌렀는데, 막상 도착한 앨범에 사진을 이리저리 놓다 보니 매우 적당한 크기였다. 소비자의 니즈를 본인보다 먼저 알아채는 대단한 사람들 같으니.
병원에서 초음파 사진을 줄 때, 한 장씩 따로 주는 게 아니라 대여섯 장씩 붙여서 즉석사진(a.k.a. 인생 네 컷) 형태로 출력해 준다. 그걸 위아래로 두 장, 혹은 세 장씩 적당히 잘라서 바탕지에 배치한다. 이대로는 허옇고 시커먼 네모들이 뭘 의미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꽃무늬 포스트잇에 날짜와 소감을 메모해서 사진 옆에 붙인다.
‘2023.08.21. 생리 예정일이 지나고 임테기가 두 줄이었다. 급히 병원 가서 확인하니 임신이었다! 아기집이 보였다.’
‘2023.09.02. 약 0.5cm. 아기가 보이고 심장 소리가 들린다. 여러모로 무난하다고 한다. 다행이다.’
나중의 나중에도 사진과 메모는 남아서 휘발된 기억을 보충할 것이다. 언젠가 아이에게 보여줘야지. 너였어, 아가. 엄마랑 아빠는 네 흔적 하나하나 소중하게 보듬으며 널 기다리고 있었어.
둘만 기다릴 수 없지. 9주 차 초음파 사진을 처음으로 친정에 갖고 갔다. 이전까지의 하얀 점 모음에 비해 젤리 곰 모양은 제법 사람 같아 보여서. 태아 초음파 사진을 생전 처음 본 아빠가 신기해했다. 엄마와 이모도 소파에 기대고 앉아 거듭 보며 귀엽다고 웃었다.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걸 본 강아지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구경하러 갔다. 식탁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알았다. 가을 오후, 사람들과 강아지가 한데 머리를 맞대고 흑백 초음파 사진을 보며 웃는 장면을, 이 조도를, 이 온도를 나는 오래 기억하겠구나.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진공의 행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