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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흐동오유 Oct 14. 2018

월드컵 기간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휴가를 내라고?

축구에 미친 영국 사람들이 회사에서 월드컵 기간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 후 인트라넷을 접속 했는데 눈에 띄는 공지사항이 있었다. 

 

'2018 축구 월드컵 가이드 (부제 : 휴가 신청)'

근무 시간 중 꼭 보고 싶은 경기가 있어 휴가를 신청하거나 근무시간을 조정하고 싶은 경우 매니저와 상의하세요. 

 

이럴리가 없어! 내가 잘못 읽었나, 내 영어가 아직 부족한가 싶어 몇번이나 글을 다시 읽었지만 반복 해 읽어봐도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았다. 심지어 '우리 회사는 당신의 축구 관람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것입니다' 라던지, '우리 회사는 당신의 휴가 요청을 ‘fair’ 하게 생각 합니다' 라는 따뜻한 멘트까지 덧붙히며 휴가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휴가를 쓰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영국 경기는 대부분 주말 낮이거나, 평일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월드컵은 6월 중순부터 시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은 6월 1일이 되자마자 시끌 시끌 했다. 벽면에 월드컵 대진표를 크게 출력하여 붙여 놓더니 각자 제비를 뽑아 국가 하나씩을 정하고, 월드컵 기간 내내 각자 뽑은 국가의 깃발을 모니터 옆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2파운드씩 판돈을 걸고 월드컵이 끝난 후 우승 국가의 깃발을 가진 사람에게 베팅한 돈을 몰아주는 일명 '사내 도박'을 했다. 나는 한국 국기를 뽑은 옆 팀 팀장에게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탔다'며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 했을 때 괜히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금요일마다 재택근무를 한다던 내 옆자리 동료는 월드컵이 매년 하는 것인지 물어 주변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물론 영국 사람이었다). 또 이 당시 모든 영국 여성(+일부 남성)들을 들썩이게 했던 러브 아일랜드’ 라는 프로그램 (한국의 이나 하트시그널’ 과 같은 데이팅 프로그램인데 기본적으로 비키니를 입고 생활하고 첫날부터 짝이 된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또 눈을 가리고 돌아가며 키스를 해본 뒤 사람별로 점수를 매김영국 사람들이 쓰레기 같지만 끊을수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아 얘기함)을 보기 위한 여자들과 축구를 보려는 남자들의 리모콘 쟁탈전이 있었다는 얘기가 회사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는 일부의 얘기일 뿐특히 이번 월드컵은 잉글랜드 팀이 좋은 성적을 거뒀던 터라 온 영국이 난리였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늦게까지 회사에 남기도 하고, 펍들마다 생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해 매장 밖까지 긴 줄이 늘어서 있기도 했다영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업무 관련 대화를 시작할 때도퇴근 인사를 할 때도 대화는 기---축구 였다또 TV를 틀어도소셜 미디어 상에도 온통 ‘It’s coming home! Football’s coming home!’을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It’s coming home’은 영국의 코미디언 두 명이 영국에서 열린 UEFA EURO 1996을 기념하며 만든 곡으로반복적인 후렴구와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하며 아직까지도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축구 응원곡이다). 유난히 덥고 쨍쨍했던(=영국답지 않았던여름 날씨와 더불어 잉글랜드 팀의 우수한 월드컵 성적 덕분에 영국 사람들은 꽤나 행복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월드컵 기간 휴가 권장하는 회사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서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댓글은 ‘워라밸이 너무 라이프 쪽으로 치우쳐 있다’ 라는 이야기였다. 가끔은 너무 다양성을 존중 하다 보니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 애매할 때가 있다. 특히나 정해진 점심시간보다 단 1분도 일찍 나가지 못하도록 (이름까지 적어가며) 엄격히 규제하고, 내가 가진 연·월차 수가 몇 개인지 알지도, 알 필요도 없었던 빡빡한 첫 회사생활을 경험한 나로서는 이런 지나친 자유가 가끔은 과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2014년 월드컵 때 각자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몰래 축구 경기를 보다가 실장님 방에서 나는 TV 소리에 이끌려 하나둘씩 모여들어 함께 (땡땡이를 치며) 경기를 보는 것도 꽤 재미 있는 추억 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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