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박혜진 작가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는 퇴행의 엔딩"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퇴행의 엔딩"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소설을 놓고 벌어진 사회적 논쟁이 특히 퇴행적이었는데 늘 보던 장면처럼 유치하게 뭉개졌다.
어쩠든 현실 속 김지영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김지영은 지금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설처럼 시간이 흘러갔다면 김지영은 학령기 자녀가 있는 학부모로 살고 있을 것이다. 김지영이 학부모가 된다면 소설은 또 어떻게 전개될까. 여러 보고서와 신문기사에 언급된 세대적 특성과 학부모의 특징에 비춰 김지영의 현재 모습을 생각해 봤다.
김지영이 태어난 1980년대 초부터 2000년 초반에 태어나 부모가 된 여성들을 '밀레니얼 맘'이라고 부른다.
밀레니얼 맘은 대학진학률이 높아 고학력 엘리트가 많고 SNS 활용에 능숙하며,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편이다. 또 개인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지만 소통에도 적극적이며 개방적이다. 주된 소통은 맘카페보다는 SNS를 선호한다. 내 시간과 자기 계발을 소중히 하면서도, 양육자로서 책임감도 있다.
밀레니얼 부모를'역사상 가장 수평적인 부모'(김용섭)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과거에 비하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김지영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여성들은여전히 결혼,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경험을 하고 있다.또 대부분주된 양육자이다.사회 구조적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성가족부가 2022년 9월 발간한 '2022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2021년 여성 고용률은 20대 후반이 70.9%로 가장 높고 30대에는 낮아졌다가 40대에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M자형이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이 점점 늦어짐에 따라 2015년에 비해 M자 그래프가 나이가 많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가사부담 인식에 있어서는남녀 모두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라고 57% 이상 답했지만 실제로는 '아내가 주로 하고 남편도 분담한다'는 응답이 절반이 넘었다.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처럼진전되었다는 인식에 비해가정 내 역할분담은 수평적이지 않다. 밀레니얼 맘도아이 양육이 중심이 되다 보니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예전만큼의 안정적 직장과 수입은꿈꾸기 어렵다.이전세대 여성의 모습과비교해도밀레니얼맘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양육자로서 밀레니얼 맘은자녀양육과 교육에 적극적이다. 일부 아동학대 사건을 두고 밀레니얼 맘들이 자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거나 양육방법을 모른다고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최근 아동학대나 방임등의 사건이 눈에 띄는 건 그런 사건 자체가 많이 없고, 최신 뉴스들을실시간으로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아동학대나 방임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것이 학대나 방임에 해당하는지조차 몰랐을 뿐이다.
김지영은 육아를 퇴직하고 싶다고 토로할 만큼 힘들어하지만 그렇다고 육아를 대충 하지는 않는다. 또 학부모 김지영은 자녀에게 친절한 멘토이길 희망한다. 학부모 김지영은 멘토가 되어 자녀의 삶이 보다 행복하고 안전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학습 매니저인 경우가 많다. 실시간으로 최신 교육정보를 습득하고, 자녀교육에 필요한 것이라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김지영도 또래의 친한 학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교육정보도 순수하게 믿지는 않는다. 전해 들은 정보와 자신이 찾은 정보를 종합해 자녀교육에 활용한다.
학교교육은 자녀 교육의 기준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김지영은 학교역할로 학업 성적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인성교육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역할도 학교가 해주길 바란다. 또 자녀 교육에 필요하면 공교육과 사교육 구분 없이 활용한다. 물론 김지영은 사교육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녀교육이 학교 교육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학부모 김지영은 제도를 활용해 학교 교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제안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현실에선 '맘충'이라는 혐오를 넘어 '치맛바람'이라는 편견에도 맞서야 한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개인적으로 자녀 교육 방법을 찾을지, 아니면 학교에 얘기해서 학교 교육을 개선해 달라고 말할지 고민만 깊어진다.
학교에는 X세대부터 MZ세대에 걸친 다양한 세대의 학부모가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있다 보니 학교 문화나 학부모 문화는 이전 세대가 만든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김지영도 이전 세대가 만든 문화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다. 김지영도 학생시절에는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학부모를 좋게 보진 않았다.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이유는 청탁을 하거나 자녀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대표해서 나서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학교 선생님들과 주변 학부모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누가 등 떠밀지 않으면 하기 힘들 것 같은 분위기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이건 '치맛바람'이 아니라 학부모의 권리다"라고 당당히 외치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학부모 김지영도 이전의 삶의 방식과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김지영이 한 발 더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부나 사회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보장도 없다.필요한 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개개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회적 담론의 형성이라고 생각한다.
김지영은 인식과 현실이 불일치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공론화하자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특히 자녀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더 주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있다. 주변의 동년배학부모에게 말을 걸어보자.인식의 변화보다는 더디지만 현실도 변화할 수 있음을 몸소 느껴보자. 시민이 되어 공론의 장에 나서보자. 자녀교육문제든, 사회문제든 말이다.
더디지만 세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면서 김지영의 삶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소설과 다른 결말을 꿈꿔본다. 통쾌한 결말은 아니더라도 퇴행의 엔딩은 아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