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의 관점에서 학부모의 행동을 이해하고 대변하며, 학부모의 권리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다. 한국학부모학회가 바로 그곳이다. 한국학부모학회(http://aspg.or.kr/)는 학부모의 눈으로 교육을 해석하고 새로운 교육연구 패러다임을 개척하는 연구공동체를 표방한다.
비판받고 비난받는 것에 익숙하며 혐오의 대상이 된 학부모들을 대변한다는 게 언뜻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학부모를 비난하면서 정작 학부모를 이해하는 것엔 무관심한 현실을 비판하고, 학부모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교육의 문제를 바라볼 때 그 해결의 방향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4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한국학부모학회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2019년에 책을 출판하는데 그 책이 바로<학부모와 공교육: 학부모 담론의 시작>이다. 이 책은 학부모가 어떤 위치와 태도로 학교교육에 참여해야 하고, 또 다른 교육주체들은 학부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철학적, 역사적, 법적, 사회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물론 2019년 출판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로 비난받고 있는 학부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꺼내 읽어볼 만했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많아 인상 깊게 보았던 몇 부분만 짧게 인용하여 소개해 본다. 관심이 있는 학부모라면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머리말에서부터 학부모에 무관심한 교육계를 비판한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계는 학부모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해 왔다. 학부모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해 온 면이 많다. 학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학부모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 학부모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학부모의 움직임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잘 모른다. 학부모의 빠른 변화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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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학부모는 사교육의 진원지 내지는 학교와 교육청을 성가시게 하는 민원인 정도로 간주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니 학부모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교육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할 의지도 없고 방법도 모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교육계는 학부모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리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너무나 많이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부모와 공교육, 2019, 이종각>
또 학교교육이라는 틀이 너무 견고하여 우리나라 공교육의 가치 실현을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교육=학교교육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져 있다. 고정관념화된 이 등식의 터널효과 때문에 우리의 사고를 심각하게 축소시키고 있다. 이 등식은 공교육 가치의 실현을 학교교육이라는 교육의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고 있다. 공교육 가치 실현은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평생교육을 통해서도, 나아가 민간영역의 교육기관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다. 공공기관이나 민간기관이 공히 공적가치 실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학교(공적기관)라는 제도가 공교육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민간기관에게도 교육의 공공성 추구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진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같은 책, 이종각>
더 나아가 입시위주 교육 구조로 인해 학생과 더불어 학부모도 피해자인데 학부모가 교육문제의 가해자인 것처럼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교육을 주도하는 교육당국이나 교사들에 의해서도 교육문제의 책임을 학부모에게 돌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비판한다.
"우리나라는 입시 위주의 교육구조다. 따라서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일상의 삶은 교육 입시화에 따라 피폐해진다. 학생과 더불어 우리나라 교육 구조의 최대의 피해자인 셈이다. 입시 구조에 따라 학생의 삶은 물론이고 학부모의 삶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문제의 원인을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교육 문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셈이다. 교육문제의 책임을 학부모에게 돌리는 담론은 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교육주체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같은 책, 오재길>
그렇다면 '학부모'는 어떤 존재인가? 학부모가 가지고 있는 교육에 대한 권리는 무엇인가?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근거로 한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은 비록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는 모든 인간이 국적과 관계없이 누리는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인권이다. 이것은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제36조 제1항,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10조 및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는 헌법 제37조 제1항에서 나오는 중요한 기본권이다.
(중략)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교육권은 교육의 모든 영역에서 존중되어야 하며, 다만 학교교육의 범주 내에서는 국가의 교육권한이 헌법적으로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받음 오로써 부모의 교육권과 함께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지만, 학교 밖의 교육영역에서는 원칙적으로 부모의 교육권이 우위를 차지한다"<같은 책, 강인수>
위의 해석에 따라 학교교육 밖의 교육 영역에 대해서는 학부모가 교육권을 가지지만,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국가의 교육권이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받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교육권과 학부모의 교육권이 학교교육에 대해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책에 따르면 학부모는 학교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집행권을 행사한다기보다는 국가에게 교육정보와 교육적 판단을 요구하고 요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교육전문적 사항에 대해 부모가 결정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교사의 교육권의 침해이며 부모의 월권이 된다고 본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유네스코/ ILO [교원의 지위에 관한 권고] 67항도 “어린이, 학생의 이익을 위해 교원과 부모의 긴밀한 협력을 촉진하는 모든 가능한 노력이었어야 하며, 교원은 본질적으로 교원의 전문직상의 책임인 문제에 대해 부모의 불공정 또는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모의 교육요구권은 교육전문적 사항에 대해서는 ‘교사에게 교육전문적 판단을 요구할 권리’, 또는 ‘교사에게 교육적 정보를 구할 권리’라고 판단하여 부모와 교사의 교육권이 양립하면서 학생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협력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현대 공교육법의 원리이다." <같은 책, 강인수>
책에서는 학교교육 영역에서의 학부모의 역할과 학교교육 영역 밖에서의 학부모의 현실적 모습도 살펴본다. 정리하자면 학교교육 안에서는 '소외자'이고, 학교교육 밖에서는 '주도자'가 된다.
"요컨대 학부모의 생태적 지위는 다중적이다.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제도 공간에서는 ‘소외’되지만, 제도 밖 일상 공간에서는 ‘주도자’ 처지가 된다. 따라 학교에서의 역할은 피동적 참여에 그치는 반면, 일상 공간에서 역할은 다양하거니와 역동적이다." <같은 책, 이수광>
따라서 학교교육 밖에서야 비로소 주도자적 위치인 학부모는 사교육에 의지하는 경향성이 커진다.
"사교육은 위약효과도 있다. 일단 사교육을 시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교육은 일시적인 투약효과도 있다. 사교육을 시키면 성적이 향상되는 게 눈에 보인다. 설혹 사교육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학부모들은 곧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같은 책, 황성희>
공교육과 사교육이 동일하게 성적지상주의 가치를 계속 공유해 간다면,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공교육의 노력이 없다면 학부모에게 사교육은 위약효과를 넘어 실제 효과를 위해서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현실은 학부모가 사교육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교육정책이 학부모를 사교육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부모가 언제까지나 국가 교육정책과 공교육에 대해 소외되고 수동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를 교육주체로 세우는 일은 국가와 교육당국의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학부모 스스로의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책에서는 이를 위해 학부모가 교육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학부모회 법제화, 외국의 사례와 함께 교육참여 휴가제, 학부모의 날 제정, 지역학부모지원센터 활성화 등 다양한 방안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학부모의 법적,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게 평가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지위 확보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학부모의 교육비판을 어렵게 하는 구조(교육비판불가구조)는 여러 장면에서 보인다. 이 글에서 계속 강조해 온 것처럼, 학부모 관련 담론의 양과 질이 낙후되어 있고 이런 취약하고 불균형한 담론구조가 학부모로서 당당하게 교육비판을 하기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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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가 국민을 의식할 때 좋은 정치, 정직한 정치를 할 수 있다. 민주국가에 시민이 있다면, 민주교육에서는 당연히 학부모가 시민의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정책관련자, 학교교직원, 교원단체들도 학부모, 학생을 의식할 때 더 좋은 교육 정책과 학교 경영을 할 수 있다. 어느 경제연구원 원장은 :까다로운 소비자가 일류 기업의 일등 공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얘기조차 없다. 오히려 ‘공교육 망치는 주범’이라는 소리만 클 뿐이다.
민주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은 기본이자 핵심이다. 그래서 시민론과 민주시민교육론이 발달되어 있다. 민주교육에서의 학부모의 위치 역시 기본이자 핵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민은 위대할 수 있어도 학부모는 위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정치사회는 상당히 민주사회로 진행되어 왔지만, 교육사회는 짝퉁 민주사회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조합이며, 부적절한 상황이다. 따라서 개혁되어야 하며, 그에 합당한 담론과 이론이 만들어져야 한다" <같은 책, 이종각>
이 책은 비난의 크기에 비해 관심은 적은 '학부모'에 대해 객관적인 현실 인식과 대안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점이 좋았다. 현실의 학부모들에게도 힘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학부모 스스로 교육주체로서 자각하는 노력이 병행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내용을 다뤄서 한 번에 읽기는 어려웠다. 또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의미가 있어 하나씩 떼어서 토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에서 제안한 이론과 정책들이 담론으로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주체들의 노력이 필수다. 그 주체는 학교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에서 고군분투하며 교육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학부모들, 그리고 학교 자율과 자치는 교육 주체들의 소통과 협력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교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