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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 Nov 14. 2024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의로운가

불평등의 내면화와 공정에 대한 강박, [한국의 능력주의]

어쩌다 수능은 삶을 결정하는 시험이 되었나


수능날. 수능은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일사불란하게 협조하는 몇 안 되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연례행사다. 그런데 단지 대학 수학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은 어쩌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시험인 것처럼 되었을까?


이런 사회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를 다룬 책으로는 마이클 샐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유명하지만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가 더 구체적이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300페이지가 넘어 읽고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아 교육에 관한 내용 위주로 발췌해 보았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입신출세를 위해 가장 유력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내면화되어 왔다. 학교교육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는 연봉 높은 좋은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이름난 대학 출신이어야 한다는 문화와 관념이 고착화되었고, 이는 다시 소위 "교육열"을 부추기는 기재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같은 문제를 풀어 ‘전국 1등부터 꼴찌까지’ 분명히 가려져야 공정하다"는 "제도와 문화 역시 그렇게 형성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학력·학벌은 ‘진정한 능력’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실제 현실에서는 학력을 능력의 지표로 명백히 인정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확실한 '능력주의' 사회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주의는 학벌과 문화자본의 독점을 낳는 악순환을 통해 사회 양극화를 가속해 왔다. 저자는 "한국의 과도한 경쟁, 교육전쟁, 학벌, 사회 양극화 등은 실력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과도한 실력주의가 가져온 폐해"라고 지적한다.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불평등'의 내면화와 '공정' 신화


한국사회에서 '능력'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정'이다. '공정'에 대한 이슈는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벌어진 공정성 시비의 절대다수는 결과가 불평등해서가 아니라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불만에서 비롯한다. 결과의 불평등을 이미 가정하기에 과정의 공정성에 더욱 민감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공정성을 문제 삼는 한국인들은 불평등한 보상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보상에 접근할 기회가 균등한지, 그 보상이 비례적으로 차등 배분됐는지에 관해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정'한 규칙에 집착하면서 '불평등'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유명한 미식축구 코치인 배리 스위처 Barry Switzer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안다 Some people are born on third base and go through life thinking they hit a tripl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환경은 전적으로 우연히 일어난다. 지구라는 행성에서도 한반도에, 북쪽도 아닌 남쪽에 태어날 확률은 매우 작다. 또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와 가정환경도 나에겐 주어졌을 뿐 내 능력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나 주어진 운에 따른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삶의 출발부터 발생한 불평등을 무시한 채 경쟁의 '공정'만 강조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법과 편법만 아니면 다 공정한 것일까.


능력주의는 경쟁의 출발선에 서기전에 벌어진 불평등은 애써 무시한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한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이라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능력주의'는 외관상 '정의로움'을 가장한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기회와 과정의 근본적 불평등, 즉 ‘실질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형식적 공정성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중략) 노골적이고 불법적인 불공정을 알리바이 삼아 현존하는 불평등을 ‘정상’으로 승인한다. "그래서 저자는 정치평론가 크리스토퍼 헤이즈 Christopher Hayes의 주장을 인용해 “능력주의 사회는 빈부격차에 가장 둔감한 사회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국평오'에 담긴 혐오와 '승자독식'의 정당화


일부 입시커뮤니티에서 시작된 국평오라는 신조어가 있다. '국민 평균 수능등급은 5등급'의 줄임말이다. 사실 수능은 1등급에서 9등급까지 나누는데 5등급은 딱 중간값이자 평균등급이다. 얼핏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수의 생각이 나와 다를 때 '국평오'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비하할 때 주로 쓰인다는 점에서 '국평오'는 등급에 따른 서열화를 내면화한 혐오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의 능력과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가치평가도구처럼 수능을 바라본다. '국평오'란 혐오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학습된 서열주의, 학벌주의가 내면화된 결과다. 이런 내면화는 수능성적에 따른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작가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은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라고 비판했다.


'국평오'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특별한 악의조차 없이 툭 튀어나온 반응들이 능력주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능력주의는 또한 계급차별을 인종차별처럼 만든다. "한마디로 ‘자격과 능력도 없는 것들이 무임승차를 통해 과도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고 있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로 "약자·소수자의 구조적 불리함을 조금이나마 교정하려는 실질적 기회균등 조치들이 모두 ‘역차별’이고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소위 ‘언더도그마 underdogma'를 말하면서 약자는 그저 약자일 뿐이지 선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약자가 반드시 선이 아니라는 주장에 나름 일리가 있지만 약자를 돕는 일이 '공익적'인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약자를 돕는 것은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지만 강자를 선망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것은 "능력주의 위계서열화"를 공고화하기 위한 차별과 혐오의 정당화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시험이라는 선발 과정" 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설계된 승자독식 피라미드"라고 지적한다. 1%의 ‘개천의 용’에게 특권을 몰아주면서  99%의 삶이 열패감과 억울함으로 피폐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아


누가 봐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불평등"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불평등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불공정에 분노한다." 


1981년 시작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라는 조사가 있다. 그대로 사람들의 가치관을 살펴보는 조사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를 확인하는 흥미로운 결과들이 있었다.

강수돌 교수의 칼럼을 통해 확인한 세계가치관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득이 더 평등해져야” 한다는 사람은 1990년 45%에서 2010년 24%로, 2018년엔 12%로 줄었다. 반면 “노력에 따른 보상 차이가 더 벌어져야 한다”는 사람은 1990년 39%에서 2010년 59%, 2018년 65%로 급등했다. 일본 28%, 미국 30%, 중국 39%, 독일 44%, 홍콩 51%보다 높다. https://v.daum.net/v/782PcWfOFD


이처럼 "한국에서 벌어진 공정성 시비의 절대다수는 결과가 불평등해서가 아니라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불만에서 비롯한다. 결과의 불평등을 이미 가정하기에 과정의 공정성에 더욱 민감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비례적 차등 분배"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보상에 접근할 기회가 균등한지"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평등이 ‘모두에게 같은 몫의 분배’라면 형평은 ‘기여, 투자, 노력 등에 따른 차등 분배’ 여기서 비례적 차등 분배'"를 뜻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형평'을 강조하고 이에 민감한 사회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쟁의 보상이 과도하게 클수록, 구성원이 선호하는 가치관이 능력주의에 치우친 사회일수록" 능력주의 확증 편향은 강해진다. 확증 편향은 제도를 더 복잡하게 설계하게 만들고 이는 다시 기득권층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로 인해 다수 국민은 경쟁의 출발선에 접근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능력주의가 강해질수록 자원이 많은 집단은 유리해진다. 돈은 물론이고 명예까지 갖길 원하는 기득권 집단의 기회 비축 기술은 정교해질 것이다. 불평등은 그만큼 더 커지고 더 공정한 것으로 치장될 것이다."



'능력주의'를 극복할 몽상의 구체화가 필요하다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경향에 따라 우리 사회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결국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는 사회 갈등과 혼란의 격화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신화를 극복할 대안이 필요하다. 물론 오랫동안 내면화된 '능력주의' 가치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계속 제기하면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여러 학자의 주장을 제시한다.


정치철학자인 롤스는 "재능의 차이를 무효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보고 "재능의 차이가 가져올 수 있는 불평등을 최대한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정치에 의해 몫 없는 이들의 몫" 이 만들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 비판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성공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 때문이라고 믿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동선共同善, the common good을 해친다고 비판" 하는 한편 "성공은 운에서 나온다"는 명제를 통해 "성공에 도취해 거만하게 굴지 말고,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을 존중하며, 건실한 공동체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주장했다. 실제로 대학입시에 제비 뽑기를 적용하자는 다소 몽상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저자는 다양한 학자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회 전체의 지식과 문화는 번영을 창출하는 데 압도적으로 큰 기여"를 하였으므로 "내가 만들어낸 것은 얼굴도 모르는 숱한 타인들의 기여가 축적된 것이며 독점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능력주의의 대안은 곧 불평등의 대안이다." 그래서 "불평등 자체를 새삼 환기하여 특권의 해소 등을 시민적 관심사로 돌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결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수렴한다."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대한 대안의 제시는 그래서 쉽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한국은행의 보고서와(한국은행: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 보고서  https://www.bok.or.kr/imer/bbs/B0000514/view.do?menuNo=500835&nttId=10087083)와 같이 어떤 대안은 몽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결론에서  '정의로우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 '능력주의'사회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므로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몽상"은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화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수능을 보기 위해 고사장으로 달려갈 학생들과 이를 안타까움과 간절함으로 바라보는 학부모들, 다시 마주하게 될 이 익숙한 풍경 앞에서 '능력주의' 가치관을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사회 문제를 극복하는데 우리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문제를 극복할 단초는 형성된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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