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사태는 국민들에게 끔찍한 기억과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그날의 진상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지만 범죄자들은 온갖 궤변으로 사람들의 상처에 상처를 더하고 있다.
우리가 참담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때 한강 작가는 지구 반대편 스웨덴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시점 지구 반대편 가장 어지러운 나라에서 온 한강은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다. 특히 한강작가는 노벨상 수상 직전 스웨덴 한림원 강연에서 자신의 소설 <소년이 온다> 집필 과정을 소개했는데 현재 국내 상황과 맞물리면서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울림을 주었다.
내가 한강 작가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솔직히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된 것은 한강 작가의 스웨덴 한림원 강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실에 다가가려는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특히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듯한 한강 작가의 섬세한 필체는 소설에 몰입하기 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 항생 과정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 속 참혹한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작가가 말하듯 <소년이 온다>에 펼쳐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1980년 5월 광주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또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하며 극복해갈 것인가, 또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엇이라 가르칠 것인가.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가? 또 인간은 이토록 존엄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는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특히 공권력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총과 칼로 무장한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할 때 그들에게 죄책감이라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짓밟기 위해 행한 무수한 고문들과 폭력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며 권력의 뒤편에 숨었다. 지금 상황과 너무나 닮았다.
작가는 묻는다.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라고.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소년이 온다> p134
하지만 패배할 줄 알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에서도 지금 현실에서도.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두려우면서도 저항하는 것만이, 죽음을 각오한다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총칼에 맞서도록 하였는지 모른다. 12월 3일 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처럼.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소년이 온다> p114
양심이 가장 무섭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인간의 존엄함을 생각하게 된다. 죽음보다 양심을 저버리는 부끄러움이 더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계엄군을 물리치는 물리력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소년이 온다> p173
저항하였지만 패배한 사람들은 폭력과 치욕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삶도 어루만진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인간이란 유리처럼 깨지지 쉬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위로하고 자책하며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한 없이 나약하지만 때로는 강하고 단단한 영혼을 가진 것이 인간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소년이 온다> p130
또 소설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실제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겪은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며 현재의 나에게 부끄러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한다.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한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소년이 온다> p135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걷다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2024년의 끝에서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건너려고 하고 있다. 너무 위험해 보이는 그 길을 건너기 위해 우리는 부끄럽게도 우리가 구하지 못한 죽은 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그들이 우리를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인도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한강 작가의 스웨덴 강연 일부를 옮겨본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중략)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중략)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