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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도시, <두 도시 이야기>

by 오영

목가적 영국과 혁명적 프랑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영국인의 관점에서 쓴 프랑스 혁명기 이야기이다. 당시 번영의 빅토리아 시대를 구가하고 있던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기 프랑스는 혼돈 속의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는 영국 런던 근교 옥스퍼드 거리에 위치한 마네트 박사의 집 주변을 목가적으로 묘사하면서 시끄러운 주변국과 다른 영국의 안정적인 사회상을 표현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에 영국의 시급한 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충격에 비하면 영국에 필요한 개혁의 모습은 너무나 목가적이었다.


<이미지 출처: 창비>


"박사네 집 근처의 길모퉁이보다도 더 기묘한 모퉁이는 런던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 앞을 통과하는 길도 없고 박사의 집 정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정겨운 풍경은 시끄러운 속세로부터 벗어난 듯 호젓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당시만 해도 옥스퍼드 거리 북쪽에 있는 그 동네에는 건물이 별로 없고 숲만 무성했으며, 지금은 사라진 들판에 야생화가 가득하고 산사나무 꽃이 만개했다. 덕분에 거처할 데 없는 떠돌이 걸인들이 교구로 몰려들듯 시골의 공기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소호를 드나들었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담들 이 많고 그 위에서는 제철을 맞은 복숭아들이 무르익었다."


반면 1789년 프랑스는 그야말로 혁명의 용광로 그 자체였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 속에서 벌어지는 무법과 무질서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마치 질서 있는 개혁의 당위를 주장하려는 것처럼.


"프랑스의 모든 숨결이 ‘증오’라는 단어로 승화된 듯 거친 함성이 울려 퍼지며,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군중의 파도가 도시 밖으로 흘러넘쳤다. 경보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북이 둥둥 울리며 격렬한 파도가 천둥소리와 함께 새로운 해변으로 밀려갔다."


"시커멓고 위협적인 인파의 바다, 파도에 파도가 밀려오며 한층 높아진 파괴의 바다, 바다의 깊이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고 위력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무자비한 바다, 보복의 함성, 고통의 용광로에서 굳어진 얼굴들 위에는 일말의 동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사연 있는 아버지와 외동딸, 개혁적인 귀족 청년


<두 도시 이야기>에는 아름다운 외동딸 루시 마네트와 함께 사는 사연 있는 아버지 마네트 박사, 루시 마네트의 연인이자 혁명의 파고에 휩쓸리는 청년 찰스 다네이, 그리고 찰스 다네이 외모들 닮았고 루시 마네트를 짝사랑하는 시드니 칼튼, 프랑스혁명 봉기에 가담하는 농민이자 마네트박사의 하인이었던 드파르쥬와 드파르쥬 부인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의 내용을 매우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만행을 일으킨 한 귀족의 음모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프랑스인 마네트 박사와 그의 딸 루시 마네트는 영국에서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루시 마네트와 결혼한 프랑스 귀족 출신 찰스 다네이는 귀족의 만행을 속죄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투옥된 그의 하인을 구명하려 프랑스로 갔다가 오히려 프랑스혁명으로 봉기한 민중의 분노로 연좌제의 희생양이 되어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온 가족이 나서서 찰스 다네이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넘어오고, 찰스 다네이가 사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닮은 꼴인 시드니 칼튼의 희생으로 가족과 함께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온다.


소설을 압축하여 설명하면 재미가 없다. 그보다는 찰스 디킨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소설 속에 표현된 상황과 풍경,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묘사 등을 천천히 읽다 보면 왜 이 소설이 당대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인물 구조와 서사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한다. 공교롭게도 <두 도시 이야기>(1859)와 <레미제라블>(1862)의 출판 시기도 비슷하다. 서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을 비교하자면 이렇다.


영국인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혁명의 비이성과 무자비함을 비판하며 영국의 질서 있는 개혁을 대안으로 말한 것처럼 보이고, 프랑스인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부패한 왕정을 몰아내고 무질서 속에서도 혁명을 성공시킨 프랑스 민중들의 힘과 그 속에 담긴 휴머니즘을 자부심 넘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같은 시대인데 다른 관점으로 쓰인 비슷한 서사의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스토리의 완결성과 감동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번역본들이 원문의 느낌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지만.



극단의 시대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h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첫 문장은 마치 2025년 대한민국을 말하는 듯하여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설은 두 도시의 상황과 삶을 비교하며 서술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의 두 도시의 상황을 한 도시 안에서 겪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는 다소 불만족스럽긴 해도 안정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었다. 그래서 남부러울 것 없는 세대에 터 잡고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 사회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취약함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은 "극단적"이라는 표현이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극단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또 그래서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각각의 파벌로 나뉘어 극단적인 선동을 하고 극단적 행동으로 나아간다.


극단적 주장에도 나름의 논리는 있다. 나 또한 그 양극단 사이의 어떤 지점에 나의 의견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합리적 토론이나 의사결정은 차치하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극단적 대결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의 안정을 심각하게 헤칠 것이라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고군분투하며 쌓아왔던 경제적 안정과 민주적 사회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음을 논리적 분석 없이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세기말 혹은 격변기적 증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현재의 민주적 질서에 따라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집중하려 하지만 누군가는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고 권위주의의 향수를 불러 새로운 독재의 가능성을 여는데 집중하려 한다. 이를 위해 대중들을 끊임없이 갈라치기하며 어느 한쪽 편에 서도록 강요한다. 문제는 일부의 선동으로도 쉽게 분열되고 파괴적 본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부 법률가, 교수 등 소위 엘리트들조차도(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불분명한 채로) 사명감에 불타올라 선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소위 우리 사회 엘리트들의 지적 수준과 지성의 수준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허약한 것이었는가 새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희망과 절망 앞에서


누구는 희망을 말할 때 누구는 절망을 말한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같은 길을 걷는다고 말하지만 등을 맞댄 채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마주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국 한쪽의 절멸이 있다. 그것을 바라는 것인가? 그야말로 극단의 시대다.


모두가 바라는 희망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외면하지 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과 대안이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어렵고, 길고, 지루한 일이 될지라도 그것이 사회를 조금은 덜 황폐화시키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회복하는데 조금 더 기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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