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오전 8:00시.
90년대생에게도 90학번에게도 업무는 공평하게 시작된다.
01학번 필자는 밤새 쌓인 이메일들을 확인하고, 팀원 변호사들에게 계약서 검토나 기업 자문 검토 등을 배정하기 시작한다. 91년생 변호사 Z는 지난밤에 이스라엘 로펌에서 보내온 자사 소송의 준비서면 초안을 검토하고 그 검토 내용 중 이슈가 되는 사항들을 정리한다. 91학번 변호사 X는 오전 스케줄을 확인하고, 컨펌해야 할 문서들을 꼼꼼히 검토한다.
(90년대생은 이미 왔고, 90학번들은 아직 있다(1)을 읽어 보면 이들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8시간이 흐르고,
법과 회사의 근태 정책이 보장하는 "퇴근 시간"이 온다.
이 퇴근 시간이란 놈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놈인지, 내가 출근만 하면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오고야 만다. 정말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 있는 놈이다. 문제는 이 놈은 늘 칼같이 약속을 지키는데, 우리가 학습해온 사회는 이 놈과의 약속을 매우 경시한다는 것이다(신뢰사회로 가는 길은 아직 멀었단 말인가. 거참.)
오후 4:58분.
변호사 Z가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정리하고, 외투를 입는다. 그리고 59분이 지날즈음 단호하고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1분도 이르거나 느리지 않게.
그리고
오후 5시 정각!
변호사 Z의 출입카드가 "띠리링- " 경쾌한 소리를 울리면 퇴근의 문이 우아하게 열린다. 그 일련의 모습에서 변호사다운 정확성, 날카로움, 단호함이 보인다. 역시 프로다.
그 친구가 일어서면 나의 몸과 마음도 조바심을 낸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생활이 좀 더 익숙한 세대이니 그 뒤를 바로 따라나갈 용기(?)까지는 없다.(그래, 나에겐 아직 용기 따위가 필요한 일이다)
오후 5:10분.
나는 사부작사부작 서류를 정리하며 시동을 걸어본다.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으면서도, 저 자가 퇴근을 준비하는구나 라는 사실이 살며시 느껴질 정도의 데시벨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2-3분 정도 부스럭 거려준다.
가방을 능숙한듯 겸손하게 챙기면서, 주변의 퇴근 상황을 체크한다. 사실 다른 이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더 남아 있을 생각은 없지만, 그 정도의 눈치 보는 시늉은 나의 윗세대들이 물려준 퇴근 시간의 미덕(?)이 아닌가.
오후 5:20분.
“띠리링-“
나는 퇴근을 했다.
이제 다음 타자는 변호사 X. 그는 과연 몇 시에 퇴근을 할까. 그도 지금쯤은 자기 차례가 왔다며 콩닥콩닥 할까...?
No Way. 그럴리 없다.
변호사 X에겐 정해진 퇴근 시간이란 것은 없다. 아마도 그런 개념 자체가 낯설지도 모른다. 변호사 X는 낮에 외부 회의를 하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밤 10시까지 하기도 하고, 급한 일이 없더라도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사무실에서 소화를 시키며 내일 할 일을 미리 하기도 하며, 가끔은 좋아하는 야구나 축구 게임을 보다가 퇴근하기도 한다. 중요한건! 근태 규칙에 정해 놓은 시간보다는 퇴근이 늦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건!!(혹은 무서운건)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 Z, X, 그리고 필자 Y.
누군가는 이런 우리들을 다르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어떤 세대가 '더 훌륭한지', 어떤 세대가 이 사회를 '더 발전시켰는지' 등의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더 나아가 퇴근 시간에 대한 태도가 마치 회사에 대한 충성도인 것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면서 칼퇴 붐을 일으켰다. 특히 90년대생들은 투쟁없이 자유는 없다는 프랑스인들처럼 칼퇴 투쟁의 선봉에 서서 값진 ‘저녁의 삶’을 쟁취했고, 이제 그들에겐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겐)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90년대생들의 ‘칼퇴이즘’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다만, 칼퇴를 해야만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지금까지의 X, Y세대들의 저녁을 마치 '인생의 일부분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무의미한 시간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 같아서 살짝 거북한 것도 사실이다.
칼퇴를 하는 자에게만 저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벗어나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힙한 취미생활을 하고, 맛집을 다니며, 요가를 해야만 '저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90학번은 어려운 부모님 밑에서 자수성가한 자신의 자리를 소중히 하며, 동행해주는 가족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앞서 나가고, 더 인정받고, 오래도록 회사에 남고 싶은 마음으로 숱한 저녁을 야근으로 보내 왔을테고.
어떤 90년생은 개인이 브랜드가 되는 세상에서 지금까지의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그 누구도 '라떼는 말이야...'라며 조언해 줄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유투버로 인플루언서로 혹은 그저 조용히 자신을 다듬으며 저녁을 보내고 있을 테고.
어떤 낀세대는 그 중간 어디쯤의 줄타기 기술을 터득하며 저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나를 거쳐, 지금의 90년대생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겐 모두 저녁이 있었고, 우리는 모두 그 저녁을 꽤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의 저녁은 모두 살아있었고, 삶의 일부였고, 우리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90학번도 90년생도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에 낀 나도 방식만 다를 뿐 사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칼퇴하는 당신의 저녁도
야근하는 당신의 저녁도
적당히 눈치 보는 당신의 저녁도
모두 가치 있다. 존중받아야 한다.
계속 그렇게 각자의 저녁을 '잘 살아 내길' 바란다.
사족)
필자는 로펌에서 다년간 일해 본 경험이 있다. 로펌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퇴근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펌 변호사에게는 클라이언트가 주인님이고(아, 나의 이 비열한 자본주의적 노예근성은 언제쯤 사라질지), 주인님의 지시가 곧 업무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여기까지도 뭐 괜찮은데. 문제는 그런 클라이언트가 동시에 다수로 존재하고, 그들의 사정과 니즈 그리고 시간도 모두 다르다는 데 있다. 그러니 도급의 성격이 강한 이 직업의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언제가 하루의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무한루프의 매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틴 후,
나는 기업 변호사로 이직을 했고, 면접의 필수 질문, "왜 이직을 하시나요?"라는 물음에,
"사무실 라꾸라꾸가 아닌 제 방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어서....."라는 얼빠진 답변을 했다는 고백을 해본다.
지금 나는 과하게 잘 자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