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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Mar 15. 2021

등교가 제일 어려웠어요

소, 닭, 그리고 미국 학교


오전 8:30분


"학교 다녀올게..."


11살 남동생이 등교,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학교로 출.발.한.지. 3시간 후 나는 등교를 했다.


(그렇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남동생은 매일 새벽 5:30분에 출발했다. 수능생 아니고, 취준생 아니고, 알바생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초등학교 4학년이 새벽 5:30분에 집을 나선다니! 이럴 때 쓰는 요즘 표현이.... "이 머선일이고!!!!"쯤 되겠다.)


"딸! 엄마가 데려다줄게."


"뭘 데려다준데... 걸어서 10분인데. 다녀올게. 빨리 식당 갈 준비나 해. 늦는다고 타박받지나 말고!"


"아니, 그래도.. 그게.. 가는 길이...."


엄마의 추가 설명을 듣지 않고 주인집 차고 철문을 쾅!! 닫으면서 등굣길에 올랐다.

.

.


이모네 대저택을 떠나 옥탑방에 정착한 후, 나와 남동생은 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Christian Academy of Guatemala(약자로 CAG)라는 학교의 고등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고, 남동생은(이제 더 이상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과테말라 공립 초등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변함없는 모교 정문


CAG 미국 학교였고, 기독교 학교였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지어진 학교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테말라로 선교를 온 미국 선교사들을 자녀들이었고, 극소수의 비선교사 자녀들도 있었다.


나는 선교사의 자녀였다. 아빠는 목사님인데, 간혹 해외 선교도 다니니 선교사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다. 내가 선택한 지위는 아니지만, 그런 특별한 지위(?) 덕에 과테말라에서 미국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본 조건은 갖출 수 있었다.


문제는 학비였다.


미국 선교사 자녀가 아니라서 학비를 내야 했는데, 옥탑방에 살면서 전화기도 없던 시절에 등록금이 있을 리 만무하던 내게 불행 중 다행인 재능이 있었으니.


.... 피아노 실력이었달까.


한국 교회 목사의 자녀들은(최소한 '라떼는') 기본적으로 피아노와 기타 정도는 잘 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나보니 목사의 딸이었던 나는 그 덕에 과테말라에서 한인 교회의 피아노 반주자로 취직(?)을 할 수 있었고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 예배 반주를 하는 대가로 학비를 받기로 한 것이다.


반면, 남동생은 취직(?)을 할 수 없었고, 등록금이 없는 과테말라 현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놈의 현지 학교의 등교시간이 극악무도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웬만해서는 부지런함에서 밀리지 않는 민족일진대, 그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현지 초등학교 등교 시간, 오전 7:30분. 부지런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건 거의 반칙 수준이 아닌가.


불행 중 불행으로 그 학교의 한대뿐인 스쿨버스가 동네 꼭대기에 사는 내 동생을 1번으로 픽업하겠다는 바람에 결국 내 동생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5:30에 등굣길에 오르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찔하다. 아니, 아찔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지.


영어도 못하는 한국 꼬마가 스페인어를 쓰는 학교에 들어가서 히스패닉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도 모자라, 그런 벙어리 꼬마가 매일 새벽 스쿨버스를 타고 2시간씩 지역 순회를 해야 했다니....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그렇다면,


8:30에 미국 학교로 등교하는 나의 등굣길에는 어이가 있었을까?


여기에서, 오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엄마는 왜! 걸어서 1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의 미국 학교에 왜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했을까.


바로 그 10분밖에 안 되는 길에 상당한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었다.


옥탑방을 고를 때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내가 학교에 걸어갈 수 있는지 여부였다. 미국 학교에는 스쿨버스가 없었고, 우리는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정상적인 도로로 학교에 도달하려면 무조건 차로 이동해야 가능했고, 차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은 시간도 문제지만 환경 자체가 불가능했다.


가능한 방법은, 옥탑방과 학교 사이의 넓은 밭을 무단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그 밭은 과테말라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생활터전이자 일터였다.


리스크 1) 그곳에는 현지인 남자애들이 한 무리 살았고,


출처: A Day on a Guatemalan Coffee Farm | Rainforest Alliance



리스크 2) 셀 수 없이 많은 닭들, 염소, 그 외 내가 잘 알 수 없는 동물들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당시 내가 지나던 밭과 매우 유사


역시 매우 유사



리스크 3) 절정은.... 소들이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상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출처: CDAIS – Capacity Development for Agricultural Innova


사는 건 가끔 블랙코미디다.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할지 애매하고 병맛이다.

                                  

그 결과, 나는 운 좋은 날은 무사히 학교에 갔고, 운이 나쁜 날은 지각을 했으며,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은 중간 숲길 어디쯤에 앉아서 한국 친구에게 하소연의 편지를 쓰며 한참을 울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나의 출석부는 졸업 불가 직전까지 결석일 수가 늘어갔다.


1998년


과테말라 살이는


그렇게 어이없음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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