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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Mar 13. 2021

과테말라 옥탑방 살이

누군가에겐 낭만, 누군가에겐 가난


대저택에 머물던 그 며칠간 이모와 이모부는 매일 싸웠다.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지 못했는데, 과테말라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진짜 익숙했던 적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이모부에게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대단히 은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모는 그 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 은밀한 일의 주인공 이름은 베로니카(Veronica),

이런 주인공은 왜 이름도 막 정열 넘치고 섹시한지....


나중에 알았지만, 이모와 엄마는 차를 타고 가다가 이모부와 베로니카가 타고 있는 차가 옆 차선에 나란히 신호 대기 중인 것을 목격하였으며, 격분한 이모의 파이팅 넘치는 액션과 베로니카의 만만치 않은 리액션에 엄마와 이모의 운전기사(이 양반도 기억해 두면 좋다. 이 자도 한방이 있는 양반이니)가 도로 한복판에서 꽤 당황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여인들의 격투도 충분히 격렬하다


잠시 막장 에피소드로 빠졌지만,

돌아오면.


그들 사이의 다툼은 곧 우리에 대한 냉랭함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뜨겁게 싸워야만 하는 그들에게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 대저택의 손님이니, 주인이 손님의 눈치를 보며 쉬쉬해야 할 의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손님 앞에서 당당하고 세련되게 치부를 드러낼 권리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우리가.  


아무래도 엄마가 가장 마음을 졸인듯싶다. 제아무리 피붙이 여동생이지만 손님과 주인 사이의 서러움은 반드시 있었을 것이고, 그 감정이 우리에게 전이되는 것을 보며 그 더운 열대지방에서도 가슴은 매일 차갑게 시렸을 것이다.


결국 이모는 우리가 스스로 월세를 내고 살만한 수준의 집을 찾아 줬고, 우리는 그 대저택을 나왔다.


과테말라에 도착한 지 딱 1주일 만이었다.  

.

.

.


우리의 새 보금자리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단독 주택의 옥탑방이었다.


이 사진은 2018년 엄마가 과테말라에 재방문하여 찍은 사진으로, 98년에 비해 외관 색상이 달라졌음



녹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주인집 차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차고 안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집으로 올라갈 수 있다. 방 하나, 작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빨래터(?)가 있었다. 가스레인지 옆에 시멘트로 발라둔 네모 반듯한 개수대가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서 알았지만 그게 빨래를 하는 곳이었다. 이런 걸 1998년 과테말라식 '빌트인 세탁기'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날로그한 그 감성 하나는 인정이다.



정확히 이것이 부엌에 딸린 빨래터. 과테말라에 사는 동안 엄마는 이렇게 손빨래를 했다.



아, 꽤 마음에 들었던 점도 있었다.


부엌 옆에 작은 철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열면 옥탑방의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동네가 경사면을 따라 오르막 지형이고, 우리 집은 가장 높은 집이고, 그중 또 옥탑방의 옥상이니.... 꽤 막힘없는 동네 뷰를 볼 수 있었지. 아날로그 감성에,  맛집, 이거 요즘  주고 찾아다니는  트렌드인데. 나름 앞서갔다고 해두자.  


정리하면,


11살 남동생, 18살 나, 엄마.

방, 빨래터, 옥상.

응.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No 침대, No 매트리스, No 전화기, 

No 티브이, No 자동차, No 세탁기, 

No.... No..... No......


다들 알겠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다 살아지는 법.

.

.

.


엄마는 신문지를 방바닥에 잔뜩 깔았다.

그 위엔 한국에서 지고 온 이불을 두 겹으로 깔았다.

그렇게 우리 셋의 안락한 잠자리가 뚝딱 만들어졌다.


우리 셋은 매일 밤 그 잠자리에서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려봤고, 더 씩씩하게 내일을 지내겠다고 다짐했고,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같은 꿈을 꾸며, 잠이 들고 눈을 뜨길 반복했다.


엄마가 잔뜩 깔아 둔 신문지 덕분에 이슬이 내려앉는 새벽녘에도 우리는 따뜻했다.

날짜 지난 신문지 따위도 어느 때의 누군가에겐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아마도 이모는 나와 동생이 한국에서 너무 고생할까 싶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에게 오면, 대저택에 함께 살 수 있고, 언니와 식당 일도 함께해서 더욱 큰 식당을 차릴 수도 있으며, 조카들은 영어 또는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을 테니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아주 선하고 애잔한 마음으로 제안을 했을 테다. 그랬을 거라고 내 모든 선한 마음을 동원해서 믿는다.


엄마 입장에서는 두려움과 매력이 공존하는 제안이었을 것이고, 생활력과 책임감 모두 강한 엄마는 우리 둘을 위해, 엄밀히 말하면 우리 둘의 미래를 위해, 두려움은 못 본 척하고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어차피 미래는 알 수 없다. 그 당시의 미래인 현재가 당시 미래에 대한 판단의 최적의 상황인지도 알 수 없다.


한국에 남았을 경우와 과테말라로 떠난 것 중 어떤 선택이 우리의 현재를 위해 더 나은 판단이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래서 나는 감사도 원망도 하지 않기로 했다.

.

.

.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서울 반지하에서 

과테말라 대저택의 2층으로

그리고 다시 3층 주택의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인생은 나쁘지 않다.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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