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낭만 사이
"내일은 진짜 빠이스* 가야 돼! 학용품도 사야 되고..."
(Paiz, 과테말라 마트 상호)
"응... 엄마가 오늘 식당 가면 이모한테 쎄살*내일 언제 시간 되냐고 차 좀 쓰겠다고 말해 볼게..."
(이모네 운전기사, 기억해야 할 양반.)
그날 밤 식당에서 돌아와 온 몸이 피곤함에 흐물거리던 엄마는
"내일은 쎄살이 엄청 바쁘다네... 우리끼리 가야겠다."
라고 했고,
나는 그 심플한 결론 뒤에 얼마나 복잡한 엄마의 마음이 있었을까 짐작되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엥? 엄마! 빠이스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해요~ 거기 그때 리사 누나네 차 타고 가봤잖아. 엄~청 멀어.”
라는 어린 남동생의 순수한 팩트 폭행에
마음은 K.O.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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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우리 셋은 일단 집 밖으로 나왔다.
이모의 대저택과 우리의 옥탑방이 있는 그 동네는 과테말라에서 꽤 부자 동네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테말라'에서 부자 동네라는 것이니 캘리포니아의 베벌리힐스를 상상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이 대부분 튼튼한(?) 차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며칠 전 신문지로 포근한 잠자리를 만들어 낸 엄마는
이번엔 차 없이 빠이스에 가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딸, 우리 지나가는 동네 차 잡아보자. 대충 뭐 빠이스 por favor라고 하면 태워주지 않겠어? 영화에서는 가끔 그렇게 막 차도 얻어 타고 그런데. 뭐 히치하이킹인가.. 뭔가 그런 게 있데. 재밌겠지? 응?"
뭐...?
히치하이킹....?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하시는게........
이런 건가요...................?
너무 초현실적인가...
음... 그럼 사실적으로는....
이거 말씀이시죠.
나는 바로 동생에게 방법을 설명했다. 차가 보이면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고 운전자가 우리를 쉽게 볼 수 있게 그 손을 위아래로 흔들라고 했다. 동생은 신나 보였다.
사실 나도 살짝 설렜다. 처음이니까.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곧 동네 각 집의 차고 문이 열리면서 동네 차들이 한 대씩 나서기 시작했고, 우리는 최대한 순수한 표정, 결코 우리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며 당신들의 이웃사촌이라는 표정으로 열심히 엄지를 흔들었다.
몇 대의 차가 우리를 흘끔거리면서 슝 슝 지나갔고, 몇 분 있으니 낡은 짙은 녹색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운전을 하던 과테말라 아줌마가 우리에게 뭐라 뭐라 했는데, 아마도 사정을 묻는 것이었을 테고, 우리는 그 질문이 무엇이든 간에 정해 놓은(혹은 실제 할 줄 아는) 말만 했다.
"빠이스, por favor~~~ 빠이스! No carro, no carro, por favor."
(한국말로 하자면, 이마트요 이마트. 차 없어. 차 없어. 엉엉. 뭐 이렇다.)
그 아줌마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무언가 다정하게 설명을 하면서, 뒷좌석에 타고 있는 두 아이를 가리키며, 뭐라고 또 한참 설명하더니, 계속 웃으며 경청하는 척(?)하는 우리를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창문을 올리고 유유히 떠났다.
추리해 보건대, 우리 상황이 안타까우나 본인 차에는 우리 셋이 탈 자리가 없다는 말이거나, 혹은 빠이스는 본인이 지금 가는 곳과 다른 방향이라는 말이었으리라. 척하면 척 아니겠는가. 참 다정한 아줌마.... 얻어 타는 것은 불발이었지만, 그래도 참 상냥한 이웃이 아닌가. 1998년은 꽤 상냥했었구나.
상냥한 이웃의 기운에 힘을 얻어 나와 내 동생은 더욱 길게 목을 빼고 엄지를 흔들었다.
이번엔 픽업트럭 한 대가 멈췄다.
운전자 아저씨가 창문을 내리자마자 이번엔 그쪽 말은 듣지도 않고, 빠이스를 외쳤다.
빠이스 por favor!!!!
아저씨는 씩 웃더니, 본인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차 뒤를 가리키며 vamos, vamos(let's go)라고 했고. 우리는 너무 기뻐서 트럭 짐 칸에 냉큼 올라탔다. 정말 기뻤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땅에서
생전 처음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탄 성과
그것이 나의 첫 히치하이킹이었다.
그 날 우리 셋은 트럭 짐칸에 엉거주춤 앉아서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놀이기구를 탄 것 같다며 빠이스를 가는 20분 내내 얼마나 웃었는지. 이 이야기를 한국 친구들에게 해주면 얼마나 놀라겠냐며 호들갑을 떨었는지.
뭐든지 처음은 설레고, 기대되고, 스릴 있고, 도전적이니까. 서툰 것도 훈장이 되니까.
뭐든지 한 번은 짜릿하고, 경험이고, 추억이니까. 창피함도 에피소드가 되니까.
그래서 몰랐다.
그 처음이 이후 2년간의 우리를 얼마나 다양한 동네 픽업트럭 짐칸에 올라타게 했는지. 그 처음이 11살 남동생을 얼마나 자연스레 히치하이킹의 동양 꼬마 챔피언으로 만들었는지. 그 처음이 얼마나 자연스레 엄마를 이 동네의 쨘한 동양인 여자로 만들었는지. 그 처음이 얼마나 자연스레 나를 가난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소녀로 만들었는지. 처음엔. 절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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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트럭 아저씨는 빠이스 입구에 차를 세워 주셨다.
"Gracias!! Muchas Gracias!! Adios!!"
우리 셋은 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운전석을 향해 최대한 크고 밝게 손을 휘저으며 인사했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뭐라 뭐라 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다정한 말을 던지고 떠났다.
그 첫 경험을 시작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졌다. 용감해졌다.
차가 없어도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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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필 무렵'이란 드라마에서 차가 없는 향미와 어린 필구가 이런 대화를 한다.
"필구야 더운데 차 타고 갈래?"
"무슨 차? 누나 차 있어?"
"잡으면 내 차지."
1998년 과테말라에서
우리는 가난이 주는 빈 곳을
엄지를 치켜세워 채웠다.
엄지를 치켜세우면 된다.
잡으면, 우리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