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다시 치킨버스는 타지 않을 것
“If you are born poor it's not your mistake.
But if you die poor it's your mistake.”
- Bill Gates
1999년이 밝았고,
과테말라에서 열여덟 살이 되었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난해서 과테말라까지 왔고,
그 가난은 과테말라에서도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수, 금 저녁에 한인 교회 피아노 반주를 해주고 학비를 지원받아 아주 운 좋게도 미국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등교가 제일 어려웠어요 (brunch.co.kr) 참조), 좀 고생스러웠어도 나름 그 당시 서울에서 유행하던 '조기유학'의 특혜를 입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 실제 뭐 그랬던 점도 있지만. 특혜만 입었다면 '가난'을 논하기에 너무 오만 방자하여 이 글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투잡이 생겼다.
"X집사님이랑, Y집사님이 애들 피아노 교습해주고 용돈 벌 생각 없냐고 그러시더라. 아마 우리 생각해서 더 배려해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어떻게 생각해...? 아니, 엄마는 꼭 하라는 건... 아니고."
열여덟 살이 된 선물로 학비 외에 생활비를 벌 기회가 왔다.
"하지 뭐. 그 두 집 다 딸들이잖아. 애들 귀엽던데."
나는 덥석 잡았다. 망설일 여유 따위 없었다.
"근데 1주일에 2번 해달라는데. 나는....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럼, 1주일에 한 번만 된다고 해볼까...?"
"그렇게 해서는 돈도 안되고, 애들도 피아노가 늘겠어...? 2번은 해야지. 페이나 좀 잘 주시면 좋겠네."
"아휴... 네가 그렇게 해주면 엄마야 너무 고마운데... 학교 공부도 해야 하는데.... 엄마가 마음이 너무...."
"한국 사람도 자주 보고 돈 벌어서 좋을 것 같애. 괜찮아. 근데 그분들은 어디 살지?"
그렇게 나는 과테말라에서 또 취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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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집을 두 번씩. 한 번은 일요일에 교회 끝나고 가서 한 집씩 차례로 레슨 하기로 하고, 나머지 한 번은 주중에 화요일과 목요일에 한집씩 방문하기로 했다. 물론 페이도 고등학생 시급으로는 꽤 괜찮게 협상이 됐다.
문제는 그분들이 사는 동네가 우리 동네에서 한참 멀었고, 시간을 엄수해야 하는 '업무'를 가는데, 확률을 운에 맡겨야 하는 픽업트럭 히치하이킹은 옵션이 아니었다.
결국 일반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드디어 과테말라 현지 대중교통에 도전이다!
음....
SNS를 보니 요즘은 그 버스를 '치킨버스'라고 부르고, 여행자들도 그 버스를 꽤 이용하는 것 같더라. 아마도 지금은 중미 여행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꽤 낭만적인 "경험치"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누가 더 멋지게 살고 있는가! 대결이라도 펼치는 듯한 SNS 피드에 올리기 충분한 쿨한 사진도 건질 테니. Why not?
그 버스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구토가 올라오는 나조차도 요즘 인스타에 올라오는 치킨버스 탑승기를 보면, '어, 저 정도면 다시 타볼 수도 있겠는데?' 하는 객기가 불끈! 할 만큼. 중미 배낭여행의 상징처럼 되버린.... 그 망할 놈의 치킨버스!
이쯤에서 이제는 뭐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 '치킨버스'를 한번 살펴보자.
다들 익히 알고 있는 스토리일 테지만.
미국에선 법정 연한(10년, 15년 등 각 주별로 상이)이나 주행거리가 넘어간 스쿨버스들, 그러니까 한마디로 미국에선 폐차가 되어야 할 노란 버스들이 싼값에 팔려서 중남미의 일반 시내버스로 재탄생한다.
폐차 비용 절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심지어 돈을 받게 되는 매도자 미국, 꽤 튼튼한 대형 버스들을 헐값에 사게 되는 매수자 중남미 국가들, 이런 딜은 정말이지 너무 합리적이라서, 해외 분쟁과 국제 거래에서 수도 없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본 나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추정컨데 요즘은 버스 물량도 훨씬 늘었을 것이고, 도로나 버스 노선의 사정도 개선되었을 테니, 버스 승차의 안락함도 발전했으리라.
하지만,
1999년의 치킨버스는
까딱하면 압사나 추락으로 누구 하나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바퀴 달린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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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투잡까지 갖게 되니 스케줄이 상당히 빡빡했다.
월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화, 수, 목, 금 모두 학교를 마치면 바로 일을 가서 저녁 10-11시쯤 귀가를 하고, 그때부터 학교 공부를 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신문지가 잔뜩 깔린 잠자리에 들었다.
수, 금은 교회 차로 이동을 하고 설교 시간에 눈치껏 졸기도 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화요일과 목요일. 피아노 레슨을 갈 때면 아침부터 온 몸이 쪼그라 들것처럼 욱신거렸다.
피아노 레슨 가는 길
4시쯤 학교에서 나와 동네를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4:30분쯤이고,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현지인들이 한가득이다.
버스가 온다.
자리에 앉아서 가기는 틀려 먹은 상태로 온다.
버스 옆구리엔 그 버스의 과거 화려한 시절이 보인다.
- Orange County oooo Junior High School-
'이 놈은 캘리포니아 부자 동네 오렌지카운티에서 팔려 온 놈이구나!'
하면서, 버스 앞문으로 가면,
문짝까지 만석이다.
고개를 들면,
버스 위도 짐보따리를 끌어안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로 만석.
버스 내부에 정상적으로 탑승하겠다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어차피 처음부터 없지만 버스 위까지 만석이면 좀 험난한 날이다.
'아이.. 씨.....’
레슨 시간은 6시.
이동 시간은 약 1시간 20분.
20-30분 뒤에 오는 다음 차를 기다릴 여유는 없다.
위축된 입모양으로 욕을 하며 버스 뒤쪽으로 뛴다.
치킨버스는 언제나 뒷문을 열고 다닌다. 그걸 닫으면 아마도 포화 상태인 내부에서 질식사를 할지도 모르니.
다행히 왼쪽 뒷문엔 아직 아무도 매달려 있지 않다.
'하아... 다행이다!’
올라탄다.
기뻐할 일이 아닌데 너무 기쁘다!
그렇게 뒷문에 매달려 가다 보면 팔 근육 운동이 절로 되고, 몇 정거장 지나다 보면 버스 안쪽으로 들어갈 틈도 생긴다. 그렇게 첫 번째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까지 40분 정도를 가서 그다음 버스로 갈아탄다.
두 번째 버스는 외부에 "매달릴” 걱정은 없다.
거기부터는 최소한 입석은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이르다.
다운타운 한복판은 늘 쎄-하다.
황량한 바이브.... 다니는 사람들도 왠지 모르게 싸늘하다.
환승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휘이이유~'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치~나~ 치나 구아~빠!"
하는 과테말라 현지 남자들의 소위 '성희롱'성 환호 및 야유가 내 사방을 감싼다.
(당시 과테말라인들은 동양인 여자를 보면 모두 치나, 즉 중국 여자라고 불렀다. 구아빠는 pretty의 뜻이다.)
낯짝이 상당히 두꺼워지고 무서울 것도 별로 없는 마흔 넘은 아줌마가 된 지금도 홀로 걷는 외국 길에서의 남성들의 야유는 소름이 끼치는데, 한창 세상의 두려운 열여덟 살에게 그 소리들은 아무리 들어도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는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같아서 체내 모든 세포들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물론 한 번도 그들이 내게 물리적인 해코지를 한 적은 없었다. (매우 감사)
하지만, 인간은 외부의 물리적 고통보다 내부의 심적 두려움에 더 취약하다.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건 한 대 맞은 후에 부풀어 오른 그 상처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디서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다.
어쨌든, 두려움과 불안감을 모두 안고 두 번째 버스에 올라 20분 정도를 가서 세 번째 버스를 탄다.
세 번째는 조금 더 편해진다.
한국인들이 사는 동네로 접근할수록 현지인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내가 보고 들은 바에 근거하여 말하건대 한국인이 그 버스를 타고 다닌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두 번의 환승을 거쳐 세 번의 버스를 타고
그렇게 저녁 6:00에 피아노 레슨이 시작됐다.
레슨이 끝나면 8시쯤 엄마가 식당에서 짬을 내어 이모네 차를 빌려서 나를 픽업했다.
기억은 끔찍한 순서대로 오래가고,
가난은 사람을 쓸데없이 오기 부리게 만든다.
치킨버스의 좌석에 앉아서, 손잡이를 잡고 서서, 뒷문에 매달려서, 지붕에 앉아서, 나는 수없이 다짐을 했다. 그래. 그냥 다짐이 아니라, 복수를 다짐했다.
'절대로 가난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이런 나라에 살지 않겠다. 다시는 장난으로라도 치킨 버스를 타진 않겠다.'
나의 복수의 대상은 '가난'이었고, 유치할 정도로 집요하게 다짐했으며, '눈에 쌍심지를 켠다'는 말은 당시 내 눈을 말한 것 같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가난은 종종 미화되기도 한다. 그것이 마치 인생의 교훈이나 심지어 스치는 낭만이 될 수 있다는 듯이.
아니.
진짜 가난은 결코 단 1초도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생존이고, 고통이고, 두려움이다.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에 받치게 만든다.
또 세상엔 종종 이런 말도 떠돌아다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니.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극복하고, 쳐부숴야 한다.
즐기며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미국, 과테말라에서 각각의 방식대로 가난해 본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어떻게든 다시는 그 가난이란 놈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한 끝에 현재까지는 다시 그놈을 만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하지만 행여 또 그 놈이 나타난다면, 난 또 철저히 부숴줄 생각이다.
덧) 지난 10여 년간 직업상 파나마, 칠레,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로 여러 차례 출장을 다녔는데, 같이 간 동료들이 재미 삼아해 보자는 로컬버스 타기나 현지 음식 탐방 등을 나는 결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쓸데없는 오기로 나의 열여덟 다짐을 실행하며 소소하게 복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