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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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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Apr 02. 2021

누구나 한 번쯤 이혼도 하지

이혼해도 괜찮아

여름이 훌쩍 다가와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회사에서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세미나가 있어서 오랜만에 차를 몰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며 애정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빵빵하게 틀어 놓고는 평소보다 신이 났다. 그래. 역시 출근보다는 외근이지!


전화가 왔다.


중학교 동창이자 25년 지기 친구 놈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한 2년 전쯤 된 놈이다.


"어. 웬일이야. 멸치는 언제 보내줄 거냐?"


"그놈의 멸치 타령은.... 몇 년째 포기를 안 하는구먼..."


평생 서울에서 살던 놈이 서른이 넘어 갑자기 거제도에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아무리 서울에서 취업이 어려워도 그렇지, 왠 거제도? 서울 촌놈이 거기 가서 뭘 하려나 했더니. 그 친구의 친구네 아버지가 멸치를 수협에 납품하시는데, 그 일을 도와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울 촌년인 나 같은 사람에겐 와 닿지 않는 업종이라서 '훗. 친구 따라 강남이 아니라 거제도를 가는군.' '뭐라고? 니가 멸치잡이를 한다고? 그거 어부들이 하는 거 아냐?'라는 매우 무지한 반응만 남발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멸치잡이가 웬만한 중견기업 월급보다 낫고, 그런 1차 산업이 꽤 돈이 된다는 것도 그놈을 통해 배웠다.  


"멸치도 안 보내줄 거면 전화는 왜 했어?"


오랜 친구와의 통화는 이래서 좋다.

구색 맞추기식 인사 따위 필요 없이 그냥 돌직구다.


"응... 너 지금 바빠...? 통화 가능?"


"지방 내려가는 중인데, 운전하면서 들어볼 테니 말해봐."


거제도에서 멸치만 잡은 게 아니라 지 맘에 쏙 드는 거제도 아가씨도 잡았던 친구는 3년 전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했고, 카톡 프로필엔 늘 본인을 쏙 닮은 딸내미 사진이 걸려있었다.


"나 이혼하게 됐는데.... 몇 가지 좀 조언받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


, 이혼. 

그래, 그거 요즘 우리 나이에 많이 하는 거지.


"그래... 합의지? 소송은 하지 마라. 그냥 어떻게든 좋게 다 합의해."


"응... 근데 조건이 안 맞으면 와이프는 소송도 고려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한테 좀 상의 좀 하려고."


그렇게 나는 평화로운 초여름 오전에

경부 고속도로 위에서 친구의 이혼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흔한 일이 돼버렸다. 이혼 같은 .

누구나  번쯤 결혼을 하듯이,

  번쯤 이혼도 하는 거지 .


애인이랑 헤어졌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으면, 만사 제쳐 두고 친구를 만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꺼이꺼이 울고 있는 친구를 다독이며 함께 울던 이십 대를 지나고.


먹고 살 일을 찾아 헤매고, 또 같이 먹고 살 사람을 찾아 헤매던 삼십 대를 지나 마흔 언저리에 다다를 즈음.


이혼 소식들이 하나 둘 들려온다.


일생 중 처음 듣는 이혼 소식에는 당장 그 친구를 만나 시니컬한 철학자 모드로 인생 상담을 하거나, 어마어마한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사로 잡히지만.


결혼한 친구가 많아진 만큼 이혼한 친구도 많아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확률적 현상이다 보니 자꾸 반복해서 듣다 보면 더 이상 어설픈 인생 수업 따위는 하지 않게 된다.


그보단, 아주 현실적인 얘기들,


예를 들어 위자료 액수의 적정성이라던지, 합의의 방식이라던지, 자녀의 양육이라던지, 거주지의 문제라던지, 그래. 정말 그렇게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 객관적인 논의가 훨씬 영양가 있음을 깨달아 간다.


이혼이란 이야기는 따로 약속을 잡고,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소주를 기울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술이 바싹 말라 가까스로 내뱉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흔을 넘겨 보니 그 주제도 여느 우리 삶의 이슈들처럼 주중 오전에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운전에 지장도 없이 편안하게 이야기 할  있는 주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덤덤하게 이혼을 이야기하는 이 즈음의 나이가 나는 싫지 않은 것 같다.


작은  하나에도 파르르 떨며  모든 신경을 콩불에 볶던 시절보다, 조금 어렵고 당황스럽고 씁쓸한 이야기들이 들어와도  안에서 잠잠해지게   있는 마음의 필터가 생긴 지금  나이가 왠지  좋은  같기도 하다.


마흔 앓이를 핑계로 대충 수를 계산해 보니(시대 때문인지, 필자의 직업군이나 친구들의 성향 때문인지, 혹은 그냥 내 주변이 유난스러운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이제 얼추 반반이다. 내 주변에서 결혼을 지속하고 있는 숫자와 이혼을 한 숫자가 그렇단 말이다.


그러니 새삼스럽지 않다.

별스럽지 않다.


이혼해도 괜찮다.


살다 보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걷기 좋은 날도 있고,



 살다 보면 각자 원하는 꽃길이 다를 때도 있고,



그냥 그렇게 주어진 삶에서 각자의 시간을 걸어가는 것이니.


이혼하지 않은 너도, 이혼한 너도, 모두 파이팅이다.


정말 다 괜찮으니까.


우린 꽤 필터링이 잘 되는 나이니까.




덧. 그래도 가능하면 소송은 피하시길. 원만한 합의를 조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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