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무모한 일정, 그래도 기초부터 다시!
파리에 돌아오고 나서,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여파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을 느꼈다.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상태였고, 그 덕분인지 약도 꾸준히 잘 챙겨 먹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이 거의 떨어질 즈음, 나는 집 근처의 정신의학과 의사를 찾기로 했다. 이전에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프랑스에서는 일반의를 먼저 방문하고 그로부터 전문의 진료를 요청하는 편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받아온 진단서를 가지고 있었고, 솔직히 그 절차를 깜빡 잊어버린 채 바로 정신과 의사에게 예약을 잡아버렸다. 첫 진료 날, 의사가 “원래 이런 식으로 예약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며 절차를 설명해 줘서 내가 단계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의사는 내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해 준 덕분에 지속적으로 진료를 이어갈 수 있었고, 한국에서 처방받던 약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학교 수업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현대 미술 수업은 발표가 있다는 것을 전년도에 알게 되어 부담을 느꼈고, 결국 미술사가 아닌 고고학 수업을 두 개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관심사보다는 학과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미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그리스 고고학·미술사 수업과 ‘원사시대 고고학(Archéologie protohistorique)’이라는 과목을 선택했는데, 처음 접해보는 주제였지만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그리고 어학원을 다시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학교를 다니며 어학원을 등록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상황을 냉정히 바라본 결과, 일단 프랑스어 실력을 더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혼자 프랑스어를 공부하겠다는 의지는 늘 있었지만, 하루하다 말다 하며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강제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아는 것을 다지며 모르는 것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프랑스어 능력을 확실히 끌어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미술사 공부 역시 탄탄한 어학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울 거라는 판단이 있었다. 시간대 문제로 아침이나 낮 수업은 들을 수 없었다. 학교 수업 일정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녁에 진행되는 파리 4 대학 소르본(Sorbonne) 어학원의 수업을 등록했다. 이 수업은 직장인을 위한 시간대에 맞춰져 있었고, 어학 비자를 받을 수는 없지만, 이미 대학을 등록하면서 발급받은 학생 비자가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필요 없었다. 짧게 하루 2시간만 수업을 듣고 끝나는 간결한 스케줄이 마음에 들었다.
등록 후 반편성 테스트 결과는 B1의 레벨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 실제 실력이었다. 체류증 연장과 학교 지원을 위해 급히 준비해 B2 시험에 합격했지만, 사실상 모래성이었다. 이전에 사립 어학원에서 등급이 빠르게 올라갔던 경험도 떠올랐다. 사립 어학원에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수익이기 때문에 약간의 실력 향상이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오래 등록하면 바로 등급을 올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너무 같은 반에만 머무르면 학생들이 어학원을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번에는 내 실력을 인정하고 낮은 반부터 차근차근 쌓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다. “대학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이런 낮은 수업을 들을 수 없어! 무리해서라도 높은 반 수업을 듣자.”는 마음으로 어려운 수업에 꾸역꾸역 나갔던 것이 이제야 아쉬웠다.
어학원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다. 이번 반에서는 내가 상위권에 속했다. 무엇보다 어학원 선생님의 실력이 여태 들어본 모든 어학 수업 중 최고였다. 학생들의 질문에 단순히 “그건 그냥 외워야 돼요.”라는 식으로 답하지 않았다. 모든 표현과 문법의 이유를 철저히 설명해 주었고, 이제는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내 실력이 성장한 것이 기뻤다. 대학교 강의를 이해하지 못해 좌절했던 나날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학 수업을 들으면서 비로소 내 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시작과 함께, 나는 조금씩 프랑스에서의 생활에 아주 작게나마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작고 소소한 성취들이 쌓이면서, 조금은 길고 멀기만 했던 프랑스 생활이 드디어 “덤벼볼 만하다.”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