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1학년
실제로 내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학교 수업도 꾸준히 잘 나가고, 인사하는 같은 과 친구도 생겼다. 물론 학교 밖에서 만나거나 특별히 교류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꽤 큰 진전이었다. 유급이라는 것은 한 해를 더 투자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했던 과정을 다시 반복하며 더 깊이 집중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물론, 나는 첫 해를 거의 날려버렸기 때문에 이 장점을 살뜰히 챙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외국인으로서 프랑스의 대학 시스템에 대해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 이 시간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 학교를 다니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대학 건물을 조금 더 요령 있게 다닐 수 있었다.
작년보다 학교에 오래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보들도 얻게 되었다. 같은 과 학생들이 만든 페이스북 그룹과 구글 드라이브에서 수업 자료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엄청난 발견이었다. 덕분에 지난 수업의 필기들을 구할 수 있었고, 이 소중한 자료들이 예습과 복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수업 중에는 필기에 대한 부담을 덜고, 대신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쓰기였다. 학교에서 주로 요구하는 작품 분석/비평(Commentaire de l'œuvre)이나 논문식 글쓰기(Dissertation)의 방법을 인터넷이나 책에서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중·고등학교 때부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이를 별도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결국 글쓰기 과외를 받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프랑스어 글쓰기 과외 선생님을 찾았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인으로, 자신을 ‘고려대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는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프랑스어 글쓰기를 공부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전공 관련 글쓰기는 교수님께 직접 물어보는 게 낫다고 조언했는데,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글쓰기는 다 똑같은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학과마다 글쓰기의 기준과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몇 달 후, 그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었고 우리의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는 ‘미술사 전공’의 과외 선생님을 찾기로 결심하고 프랑스의 과외 선생님 매칭 사이트를 뒤졌다. 그곳에서 ‘루브르 학교(École du Louvre)에서 수업한 경력이 있는’ 한 선생님을 발견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연락처를 남겼고, 곧 전화가 왔다. 그녀와의 통화에서 나는 미술사 전공을 시작한 외국인 학생이며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상황을 솔직히 말했다. 수업은 그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아늑한 카펫 바닥, 여러 간접 조명, 패브릭으로 덮인 가구들로 이루어진 공간은 나에게 ‘전형적인 프랑스인의 집’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녀는 나를 배려하며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해 주었고, 나는 큰 호감을 느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꾸준히 함께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학기말 고사는 여전히 나에게 큰 산과 같았다. 복습도 열심히 했고 글쓰기 수업도 꾸준히 들었으며, 1년 넘게 약도 잘 챙겨 먹고 있었지만, 시험장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험장에 들어가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나올 것 같은 악몽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결국 그 해에도 나는 시험장에 가지 못한 채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만큼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나를 현장에 던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 과정은 단순히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장해 가는 여정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