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에서 깨달은 ‘알고 본다는 것의 힘’
과외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적합한 교재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학교 수업의 필기를 기반으로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당시 나는 학교 수업에 참여하면서도 내용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고, 아직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필기를 공유한다는 개념조차 몰랐다. 결국, 과외 선생님인 Egler 부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19세기 미술을 중심으로 가르치기로 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글쓰기도 함께 진행하며 공부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Egler 부인은 나처럼 미술사학을 전공했고, 잠시 루브르 학교(École du Louvre)에서 19세기 미술에 대해 강의한 경험도 있었다. 현재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개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파리 미술관에서 새로운 전시가 열릴 때마다 콘퍼런스를 열거나 글을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계통의 일을 꾸준히 하면서 스스로도 학문을 계속해서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수업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신고전주의에서 시작했다. 선생님은 화가의 생애뿐만 아니라 작품을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전통과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구도와 요소들에 대해 하나씩 알려주었다. 선생님에게는 당시 대여섯 살쯤 된 어린 두 아이가 있었는데, 마치 내가 그 아이들 또래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 친절하고 성심껏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드디어 학교에서 요구하던 글의 첫 번째 부분인 ‘묘사(Description)’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매 수업마다 짧은 글쓰기나 작품 묘사, 해석과 같은 과제를 내주곤 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을 읽으며 글을 써갔지만, 사실 대부분 책 내용을 그대로 ‘복붙’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내 문장으로 써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책 내용의 흐름이 있는데, 나는 중간중간 문장만 떼어 쓰다 보니 텍스트는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왜 이 단어가 지금 나와서는 안 되는지, 문장이 왜 어색한지 하나하나 설명하며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과외 비용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선생님과 앵그르까지 이어지는 신고전주의를 마치고, 낭만주의로 넘어갔다. 그즈음 선생님은 루브르에 가서 우리가 공부한 작품들과 지금 배우고 있는 작품들을 직접 보고 오라고 권하셨다. 그동안 거리를 두었던 이 박물관에 오랜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이 많아 북적이는 곳에서 헤매지 않도록 딱 볼 작품들만 보고 나올 생각으로 들어갔다. 루브르에서 신고전주의 작품이 있는 방을 찾아 열심히 걸어 들어갔을 때,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1805-1807)’ 작품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그 규모와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압도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 하나하나 펼쳐지듯 나타났다. 작품의 구도, 터치, 색감, 디테일한 장식들까지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이 작품은 유명한 만큼 이전에도 분명 루브르에서 본 적이 있었겠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는 듯했다. 감격과 감동이 밀려왔다. 마음속에서 뜨겁고 울컥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절실히 느꼈다. 공부하기 전에는 그저 유명한 그림으로만 보였던 작품이,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마주하니 각 요소들이 하나하나 다르게 보였다. 그림을 읽는 법을 배우고, 화가의 의도와 역사적 맥락을 알게 된 후 바라보는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감동을 선사했다. 그날의 경험은 미술을 공부하는 데 있어 더 깊은 의미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 공부를 이어가는 데 있어 변함없는 동기와 열정의 원천이 되었다.
그 후로도 그날만큼 어떤 작품을 보고 감동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훌륭한 작품이 이미지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때가 있었지만, 텍스트로만 접했던 이 작품의 이야기가 생생한 실물로 다가왔을 때의 감동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처럼 작품을 ‘보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배움은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감동과 깨달음으로 가슴을 울렸다. 그날의 경험은 미술을 공부하는 데 있어 더 깊은 의미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 공부를 이어가는 데 있어 변함없는 동기와 열정의 원천이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최근, 나는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해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Annunciation, c. 1426)’를 만났다. 이 작품은 학사 과정에서 중세 미술사를 공부하며 지나간 작품 중 하나였다. 당시 이미지로 보았을 때 가브리엘의 날개는 갈색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날개는 황금빛으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반가움과 함께, 예상치 못한 황금빛이 주는 놀라움은 잠시 이 감각을 잊고 있던 나를 다시 한번 미술의 세계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