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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1학년, 그리고 새 친구

닫힌 마음을 다시 연 순간들

by 삐빕
Pexels에서 Erik Mclean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9689364/


두 번의 유급, 그리고 세 번째 도전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처음 신입생이었을 때보다 유급한 두 번째 1학년은 약간 더 수월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나를 조금씩 발전시킬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긴 했지만, 학기말 시험에 참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학교에는 학기말 시험에서 기준 점수인 20점 만점 중 10점을 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재시험(rattrapage)’ 제도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해볼 만한 과목들의 재시험에 도전하기로 결심했고, 몇 과목을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과목은 아니었지만 통과한 과목들은 재수강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덕에 두 번째 유급을 맞이한 세 번째 1학년은 들어야 하는 과목 수가 줄어서 조금 더 수월했다.


나의 두 번째 1학년 때, 신입생으로 들어온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첫해의 나처럼 학과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작년의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아낌없이 나눠주었고, 구하기 어려웠던 필기 자료도 모두 건넸다. 하지만 그 친구는 1학기를 마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연락해 보니 너무 힘들어서 과를 옮겼다고 했다. 보답받으려고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연락 한 번 없이 떠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두 해에 걸쳐 같은 과의 한국인들과 크고 작은 트러블이 생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다. ‘그래, 어차피 나는 이제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마음으로 꿋꿋이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맨 앞자리, 새로운 태도

세 번째 1학년을 맞이하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교수님이 혹시라도 말을 걸까 봐 교실 한가운데나 뒤쪽에서 숨어있듯 앉았는데, 이제는 맨 앞자리에 당당히 앉았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가장 깨끗하게 들리는 자리였다. 교수님이 딱히 말을 걸어올 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 것도 있었지만, 설사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었다. 조금 못 알아들은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저 정도 프랑스어도 못하면서 수업은 어떻게 듣지?’ 하고 생각해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파리에서 찾은 새로운 첫 번째 친구

어느 날 밤, 교실 수업과 강당 수업이 연달아 있던 날이었다. 교실에서는 문학 수업이 있었고, 바로 이어지는 강당 수업을 위해 모든 학생이 함께 이동했다. 나는 늘 그렇듯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이미 사람들이 앞 줄의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그들에게 잠시 비켜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그때,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귀여운 동양인 여성이 밝은 목소리로 “Tu veux t’asseoir ici? (여기 앉으려는 거야?)”라고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여성과 함께 앉아 있던 몇 명이 내가 안쪽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외국인 문학 반에서 몇 번 마주쳐 안면이 있던 중국 여성이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된 그 친구는 내게 조금 전 말을 걸었던 여성이 한국인이라며 소개해 주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서현이었다. 간단한 인사와 통성명을 나눴지만, 내 굳게 닫힌 마음 탓에 대화를 길게 이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되었고, 메트로 역 앞에서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던 중 서현이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묵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마치 걸어 잠근 빗장을 햇살이 부숴버린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금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서현이와는 학교의 모든 것을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고, 내게는 아주 오래간만에 특히 파리에서는 처음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새 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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