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이 타지에서 살아남는 방법
종종 오래된 한식당에 손님으로 가거나 면접을 보러 가게 되면, 그곳의 점장급 직원들과 마주하게 된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본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인상은 상당히 강렬했다. 오랜 해외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거지 같은) 일들을 겪어왔을까. 나는 아마도 초반에는 다정하고 서글서글했을 그들의 과거 모습을 그려보며, 해외에서 살아가는 일의 험난함을 다시금 실감하곤 했다.
아시안 여성으로서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은 꽤나 고단한 일이다. 일단 온갖 이상한 남자들의 캣콜링 대상이 된다. 예전에 남자 친구들은 ‘니하오’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꽤 충격을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유모차를 끄는 아시안 여성도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즉, 이 ‘니하오’라는 말에는 특정한 타겟층이 있었다. 처음에는 길에서 듣는 ‘니하오’나 ‘칭챙총’ 같은 말들에 의기소침해졌고, 한껏 우울해지곤 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유형의 모욕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에 적응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뎌졌고, 이제는 못 들은 척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냥 그렇게 사는 불쌍한 놈들, 못 배운 인간들’이라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며 맞서 싸울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내려가면서 이제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거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내 몇몇 친구들은 달랐다. 예진이는 체구가 작은 친구라 지하철을 탈 때면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깔아뭉갤 뻔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예진이의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사라졌다. 뒤에 서 있던 프랑스인 학생 무리 중 누군가가 가져간 것이었다. 예진이는 물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뒤에 있던 사람을 향해 강하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내려서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끝까지 달려들었다. 결국 친구의 짓임을 밀고한 한 학생으로 인해 예진이는 핸드폰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작은 체구로 어떻게 그렇게 집요하게 싸울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리옹에서 함께 어학 과정을 마치고 나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 올라온 하은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우리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노숙자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더니 점점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가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하은이는 나를 자기 뒤로 밀어 가려주고 그 노숙자를 팔로 막아섰다. 그리고 단호하게 밀어내며 가라고 했다. 평소에는 애교가 많고 어리광을 부리던 친구였기에,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륜이는 베르사유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집을 구해 살고 있었다.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장거리 이동이 잦았던 그녀는 길에서 시비가 붙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프랑스인 백인 아주머니, 흑인 이민자 아주머니, 아랍인 소년들 등과의 크고 작은 충돌을 겪으며, 가끔은 ‘저번에 누구누구랑 싸웠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는 힘든 일을 묵묵히 감내하며 불평도 하지 않는 친구였지만, 밖에서는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드러내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싫은 소리도 잘 못하고,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런 그녀가 바깥세상에서는 단호하게 맞서 싸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해외 생활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했다. 나는 점점 기대치를 낮추고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면, 내 친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직접 맞서 싸웠다. 그게 어떤 형태의 방식이든 우리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존을 위한 싸움을 이어가는 ‘쌈닭’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