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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팬데믹 같은 소리

2020년의 혼란, 그리고 나의 선택

by 삐빕
cottonbro studio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3957988/


2020년, 모두에게 닥친 위기의 시작

때는 그 유명한 2020년. 새해가 되었고, 아시아에서 먼저 퍼진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무섭고 암울했다. 그런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마치 이 대륙은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유럽인들은 그런 것쯤은 문제없이 이겨낼 수 있다는 듯, 더 활발하게 모임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책 없이 낙관적이던 유럽에도 코로나19는 금세 닥쳐왔다. 봄쯤이었을 것이다. 연일 뉴스에서는 새로운 확진자 수와 정부의 권고 사항을 전했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방역 지침과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마스크 착용이 필요하다고 발표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어렵게 마스크를 구해서 착용한 아시아인들은 괜한 눈초리를 받거나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정말 마스크의 필요성을 몰랐을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의 한 종합병원에서 마스크를 노린 강도 사건이 발생한 걸 보고, 그들의 대응이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도시가 멈추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교직원과 학생들 사이에서 감염이 시작되었고, 곧 나라 전체에 ‘이동 통제 명령(confinement)’이 내려졌다. 필수적인 장보기, 운동, 반려견 산책 등의 목적으로 하루에 한 시간만 외출이 허용되었다. 외출할 때는 종이에 인쇄한 증명서를 지참해야 했다. 집 주소와 외출 시간을 기재한 후, 길거리에 배치된 병력의 요구가 있을 때 이를 제시해야 했다.


달라진 일상, 그리고 여전한 과제의 압박

그 와중에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제한된 일상을 벗어나고자 했다. 남의 강아지를 빌려서 산책을 나가는 사람들, 원래 조깅을 하던 사람인 척 운동복을 입고 뛰어나가는 사람들. 이런 유머 섞인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집에 머물렀다. 어차피 원래도 집순이 었으니까. 필요한 장을 보러 나가는 것 외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쌓여 있는 ‘과제’였다. 열댓 개쯤 되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도서관이 문을 닫아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인터넷에 있는 한정적인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 싫어서 빈둥대다가, 베르사유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정륜이와 하루 종일 줌(Zoom)을 켜 놓고 함께 과제를 하기로 했다. 서로 말을 걸고, 밥 먹으면서 뭐 먹는지 공유하고,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자랑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덕분인지, 이 루틴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씩 과제를 해나갔다.


귀국해? 말아? 해!

원래 그해 여름, 나는 한국에 가려 했다. 에어프랑스 직항을 진작 예약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비행 편이 취소되면서 일정이 계속 잡히지 않았다. 아시아나 항공으로 바꿨다가 결국 그마저도 취소되었다. ‘이번엔 한국 가는 걸 포기해야 하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협하고 있던 참이었다. 괜히 이동했다가 감염되면 가족들에게 옮길 수도 있으니, 그냥 참고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파리에 살던 한국인 친구들이 하나둘 한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멀리서 인사만 건넸다. 그러던 어느 날, 정륜이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몇 개월을 매일 같이 함께해 온 친구가 떠난다고 하니, 갑자기 조바심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안 되겠다. 나도 한국 갈래.’


그 길로 유일하게 운항을 하던 대한항공 티켓을 예약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같은 나라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은 마음가짐이 아예 다르니까.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한국은 온전한 안식을 주었다. 2주간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시차 적응 탓에 낮에는 거의 잠만 잤다. 다만, 핸드폰을 두고 외출했다고 담당 공무원에게 의심받아 전화가 계속 오던 것만 제외하면, 한국에서의 격리는 상대적으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몇 달 동안 파리에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시간을 돌이켜 보니, ‘내가 대체 무슨 정신적 학대를 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거리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보았던 혼란과 무질서가 이곳에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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