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절, 네 번의 이사 그리고 불안한 하루하루
힘겹게 한국에 들어가 치른 면접은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탈락이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 결론은 내게 꽤 큰 문제를 야기했다. 나는 합격을 전제로 한국에 들어가는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파리의 집에는 이미 퇴거 통보를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집을 비우기 최소 한 달 전에 고지해야 하기에 나는 면접을 위해 한국에 가기 전 미리 집주인에게 통보를 했다. 아무도 다음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다면 사정이 있었노라 설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로 다음 사람이 정해진 상황에서 나는 반드시 집을 비워야 했다.
한국에서 학업을 이어가려던 계획이 무산되면서 나는 다시 파리의 학교들로 눈을 돌렸다. 이미 정규 지원 기간은 끝났지만, 몇몇 학교에서 추가 모집이 있었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본 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여름을 임시로 보낼 집을 찾아야 했다. 장기 거주를 계약하기엔 앞날이 불확실했고, 잠시 한국에 들어가는 한국인들이 내놓는 단기 임대 집을 찾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름의 파리는 비쌌다. 정식 계약이 아니었기에 국가로부터 주택 보조금을 받을 수도 없어, 내 통장은 점점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비자 만료일도 가까워졌고 체류증 연장을 위해선 다음 학업 과정이 확정되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여름이었다.
내가 머문 첫 번째 집은 7구에 있는 복층 하녀방이었다. 집 전체에 예술적인 감각이 묻어났고, 거주자 역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어서 대화가 잘 통했다. 공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해 여름의 파리는 무척 더웠다. 복층은 처음이었는데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실내 온도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더운 날에는 복층의 침대를 포기하고 아래층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자곤 했다. 다행히 이 방은 양쪽에 창문이 나 있어 맞바람이 불어 들면 조금은 나았다.
그 친구는 내 상황을 고려해 주택 보조금의 절반을 지원해 줄 만큼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다만 집에 머무는 동안 전기 요금 문제로 두 차례 정전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불편은 적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정전 상황에서 호텔을 예약할 여유조차 없었던 나는 꽤 큰 스트레스를 겪었다. 약속된 기간을 무사히 채우고 남은 한 달 반쯤을 보낼 새로운 집으로 옮겼다.
이번엔 큰 집을 함께 사용하면서 각자 방을 하나씩 쓰는 동거 형태였다. 가족 외의 타인과 살아본 경험이 없던 나는 우려가 있었고 주변 친구들도 걱정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성수기 파리의 단기 집세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거인은 처음엔 유순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청소는 제가 맡을게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청결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집은 내 공간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선을 긋는 방식이었다. 청소는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집은 늘 지저분한 상태로 유지돼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결국 참다못해 내가 청소를 하면 오히려 본인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결국 갈등이 심해졌고 나는 중간에 그 집에서 나오게 됐다.
마지막으로는 이사를 하게 된 친구 예진이의 배려 덕분에, 비워진 그 집에 잠시 머물 수 있었다. 그곳이 그 여름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몇 번이나 짐을 싸고 이사를 반복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너무 지쳤고, 괴롭고, 답답한 시기였다. 아마도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누적된 스트레스가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로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 여름의 기억은 어디에도 완전히 발붙이지 못했던 내 삶의 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