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시기, 같은 온도의 우정에 대하여
나는 천성적으로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보다는 1:1로 마주 앉아 깊게 대화하는 순간을 더 편안해한다. 그래서인지 내 인간관계는 폭넓기보다는 깊이 있는 소수의 관계로 이어져왔다. 그런 나에게는 ‘10년에 한 번’쯤 나타나는 소울 프렌즈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난 유진이는 10대의 소울메이트였다. 입시를 함께 준비하면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붙어 지냈고, 그만큼 서로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20대에는 예진이를 만났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며 알게 된 그녀와는, 낯선 타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많이 있었지만 어떤 이야기를 하든 긴장 없이 속마음을 꺼낼 수 있었던 건 이 두 사람이 전부였다.
30대의 소울메이트 건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논문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던 시기, 현실적인 이유로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미 익숙했던 식당 서버 일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경험이 있었기에 큰 부담 없이 지원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개업한 지 한 달 남짓 된 신생 레스토랑이었다. 사장님은 식당 운영이 처음이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익숙한 업무를 통해 이래저래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이 생겼지만 나는 어느새 점점 지쳐갔다. 그저 아르바이트일 뿐인데, 일 하나하나가 마무리되지 않고 엉켜버리는 상황이 계속되자 내 에너지는 점점 소진되어 갔다. 그런 시점에 건우가 들어왔다. 첫인상은 솔직히 특별할 게 없었고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다. 사실 처음엔 내가 별로 곁을 주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타임에 계속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친구의 일하는 방식과 넓은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음에 하려던 일을 미리 준비해 놓은 걸 봤을 때, 그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 놀라고 고마워서 건우의 팔뚝을 툭 쳤다. 여자였으면 아마도 안아줬을 텐데 남자라서 그럴 순 없었고, 그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감격’이었다.
일이 끝나고 함께 술을 한잔하면서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물론 유진이나 예진이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건우와의 대화에는 묘하게 깊이가 있었다. 때로는 진지했고, 때로는 유쾌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좋은 동료’ 이상이었다.
나는 종종 내 인간관계를 '큰 마당이 있는 집'에 비유하곤 한다. 누구나 마당까지는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집 안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극소수다. 나는 낯가림은 없는데, 정말 가까운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신중해지는 편이다. 그런데 건우는 마치 ‘드론’ 같았다. 어느새 마당을 지나 집 안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
30대가 되어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 인간관계는 20대 즈음 정리되었다고 여겼고, 이후에 사회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인연이 그 확신을 뒤흔들었다. 10년에 한 번씩,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등장해 주는 소울 프렌즈들. 그 존재들 덕분에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세상과의 연결을 조금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