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차고도 슬픈 이름 '밥'

밥태기낭구때문에 또 울컥했습니다.

by 박길숙

노래를 찾아 떠났던 길


한동안 사라진 우리 일노래(전통 노동요)를 녹음기에 담으려고 이곳저곳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한국 탐구 시리즈> <한국의 미> <소리 100년 생활 100년> <한국 한국인> <어머니의 사계> <세습무> <아리랑> <사투리> <시인의 마을> 등을 제작하느라 소리와 노래를 찾아 꽤 오랜 시간 길을 걸었지요. 텔레비전과는 달리 라디오는 스텝이 많지 않아 호젓합니다. PD와 둘이 가거나 간혹 음향효과 담당이 동행하는데요. 저는 혼자 떠난 적이 많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음주운전을 할까 봐 아예 운전 면허증을 따지 않은 덕분에 출장길은 꽤 험난했지만 얻은 건 참 많습니다.


기차로 갈 경우 역에 내리면 다시 군내(郡內) 버스를 갈아타고 목적지에 내려서 이장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목적지가 작은 섬일 경우에는 배를 타고 또 망망대해를 건넙니다. 선착장에 내려서 물어 물어 취재원을 찾가는데요. 이 과정에서 뭇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만납니다. 작은 배에 흔들여 가면서 묻는 게 습관이 된 저는 묻습니다. 남도에서는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러면 에둘러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무다라 늙은 이 나이를 다 물어보까 울 엄니가 올해 이른 너이요” “그럼 쉰?” “아니 신 다섯” 이쯤 되면 옆에서 나서는 이가 있습니다. “무쟈게 젊구마 근디 무다라 늙은이락 해싸요” 이러면서 이야기 판이 펼쳐지고 대부분 종점에서 같이 내려 취재원 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방송에 이런 과정이 담기면 훨씬 쫄깃하고 맛이 있는데요. 방송이 아니더라도 길에서 배우는 공부는 참 요긴합니다.


밥태기낭구


요즘 이팝나무인지 조팝나무인지 아리송한 나무들이 하얀 싸래기를 천지에 뿌려놓았습니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이 나무로 바뀐 곳이 많아 벚꽃이 지고 나면 가로변이 온통 설국(雪國)이 된 듯한데요. 전라도에서는 이팝나무를 밥태기낭구라고 합니다. 밥태기는 밥알, 낭구는 나무인데요. 예전에 이 맘 때 할머니 한 분을 만나 시집살이 노래를 녹취했는데요. “밥알 낭구에 꽃이 피믄 무단시 눈물이 나와 애릿을 때 배를 곯아가꼬..” 노래를 하다 말고 툭 던진 이 말에 그만 울컥했습니다. 밥태기는 밥그릇에 담긴 밥알이 아닙니다. 전라도에서는 밥주걱에 붙거나 옷에 흘린 밥알을 밥태기라고 하는데요. 흥부가 형수한테 주걱으로 뺨 맞은 장면을 떠올려보시면 짐작이 가실 겁니다. 밥태기는 배를 채우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이팝나무를 보고 주걱에서 떼어먹는 밥알을 연상하며 밥태기 낭구라 불렀던 사람들. 목숨을 연명하는 끼니의 소중함을 봄 가고 여름 오는 길목에서 헤아려 봅니다.


이제 시작인데 뭐


필라테스를 하러 가는 길은 물 웅덩이도 무섭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만 사는 시간이라 그럴 겁니다. "어깨에 힘을 빼시고요. 배꼽을 등에 붙인다 생각하세요. 오케이 잘하셨어요. 허리와 등 머리가 일직선에 있다고 상상하시고요. 배꼽에서 티슈를 한 장씩 뽑아내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가 둘에서 숨을 토해내세요. 하나 둘 오케이!!! 참 잘하셨어요" 필라테스를 배우러 가는 길에 만난 풀잎도 저처럼 새로운 각오를 다지네요. 밥태기낭구를 닮을 건가봐요. 풀잎을 대신해서 제가 일기를 썼습니다.


풀잎 일기


밥 먹을래?

아니면 우유 마실래?

그냥 커피를 줄까?


아니, 오늘 난

뻥 뚫린 심장을 채울

바람을 먹고 싶어

안개에 젖은 초록빛 바람

36.5도 독한 소주에 타서


저마다 어둠을 하나씩 짊어지고

제 방으로 몸을 숨기는 저녁 참

시방 나는 혼자야


뿌리가 간지러워

마구 흔들리고 싶어

마른번개라도 기다릴테야

거친 숨소리 삼킬거야


내 등짝을 후려치고 간

사랑 그게 뭐 별거라고

나는 좀 더 단단해져야해

이제는 눈물 감추지 않을거야


알았어 그럼 술 마실래?

아니!

그럼 뭐 할건데?

지금 나 뛰고 싶어

이 길 따라서 쭉 달려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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