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길숙 Aug 20. 2019

1953년 생에게 보내는 편지 (1)


J야 어딨니?


지금 문득 네가 보고 싶다.

내게 詩를 알려 준 너

내가 중학생이었고 네가 고등학생이었는지

아님 그 반대인지 가물가물 하다.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그때 난 엄청 뚱뚱했고 넌 참 핸섬했어

까만 교모(校帽)에 반듯한 교복, 날이 선 턱선과 눈빛

우린 무슨 독서동아리 멤버였을 거야


한 달에 한 번씩 모였을 거야 책 읽는 시간 많이 가지려고

그때 읽어야 할 책 번호가 100번을 넘었던 거 같아

너는 모든 책을 통독했던 거 같고,

게으른 나는 숙제를 잘 안 했지.

서문만 읽거나 제목만 훑어보고 배짱 좋게 동아리에 참석했던 건

순전히 너 때문.   


그 시절 너희들은

햄릿, 신곡,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에 심취했고

난 詩를 많이 봤어.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에서 詩만 발라내어

따로 책으로 묶어서 봤지. 너처럼 좋은 시를 쓰고 싶어서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험한 일도 많이 겪고,

미친놈 짓도 참 많이 한 나, 차마 털어놓기 민망한

무렴한 짓 많이 하고 살았으면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건

니 덕분이라고 생각해. 詩힘을 알게 해 준. 




지금도 너의 詩를 읽는다


내가 바른 사람 말 안 듣기로 유명해

뻥 잘 치고 헛짓을 많이 해 내 딸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미당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들어야 될 거 같아


1985년쯤인가 신춘문예 당선 인사겸

방송 프로그램 <詩人의 마을> 취재도 할 겸

남현동 예술인 마을 미당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


당신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시집은

죽은 후 관(棺) 위에 놓을 단 한 권 책이라며

자네도 그런 마음으로 詩를 쓰라고 하셨어

관 위에 올리는 마음으로 상재(上梓) 하라고,


그래서 난

내 관 위에 올려놓을 단 한 권의 시집을 꾸리고 있어

지금은 혼자만 몰래 읽지만

언젠가는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시집이 되길 바라면서, 

그러면서 네 시집 펼쳐 공부한다.


195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69년에 내놓은 시집

네가 상재한 그 시집은 충분히 아주 충분히

관 위에 올려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야


세월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흐른 탓에

너는 네 책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고

만약에 없다면 바람결에라도 부치고 싶어. 진심   


매거진의 이전글 황혼육아 즐거운 or 지겨운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