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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Aug 21. 2019

황혼육아 즐거운 or 지겨운 전쟁


지겨운


2019.8.21 수 오전 7시 54분 폭탄이 일어나셨다.

일어나자마자 팬티부터 갈아입겠단다.

자기 전에 갈아입은 팬티,

새벽에 한번 더 갈아입었다는 데 기어코 벗어던진다.

팬티에 오줌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더럽다고 기겁을 하면서.


손도 안 씻고 밥 먹어 맨날 혼나는 녀석이  

유별나게 팬티 결벽증이 있는 게 이해불가 


지 에미는 그냥 입으라고 소리치고

그 소리 듣기 싫어 새 팬티를 꺼내 주니까

손으로 안 받고 발로 받더니 그대로 휘익~~~ 

이강인 뺨치는 슛돌이가 된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팬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거실이 넓으면 넓어서 못 찾는다고 하지

여시 콧등만 한 거실에서 찾을 길이 없다.

지 에미는 이따 와서 가만 안 둔다고 겁을 주고 출근하고,

새 팬티를 다시 꺼내 입혀주는데 이건 완전 상왕 마마다.


벌러덩 누워 손으로는 비행기를 날리고 발로는 축구

팬티, 양말, 겉옷 입히는데 땀이 바가지로 흐른다.

할아버지까지 거들어 겨우 옷 입고

밥 세 숟가락 먹는데 20분이 걸린다.

지 에미가 8시 25분 전에 나가고 했건만 5분이나 지났다.


치카도 대충 세수도 대충 겨우 신발을 신었는데

이번에는 블루 메카드 쿠로 우를 달랜다. 학교 갖고 간다고

파란색 유리로 까마귀 같이 생겼다는데 찾을 길이 없다.

학교 갔다 오면 있을 거라고, 꼭 찾아놓는다고 달래 데리고 나간다.

기어이 갖고 간다고 집으로 기어들어 오는 녀석을 전사적으로 막아서

그나저나 어디서 블루 메 카트 크로우를 찾아야 할지,  



즐거운


손주 팬티를 찾았다. 책꽂이 맨 위칸에서,

잡동사니를 올려놓아 돼지 굴속 같은 곳 

쳐 박아 놓은 로션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다.

지 에미가 어렸을 적에 장난감 목마에 씌워 놓아 헤매게 만들더니

그 속에서 나온 아들도 똑같다. 그저 신기할 따름. 나도 어렸을 적에 그랬을까?


빨래, 아침 설거지, 청소 대충대충 건성건성 해놓고 

물 끓여 만든 백비탕(白飛湯)에 밥 말아먹고 스트레칭 한판.

동의보감에 '감기에는 물을 펄펄 끓여 만든 백비탕을 마시면 좋다'라고 나와 있다.

우리 아버지도 국이 시원찮으면 백비탕에 밥 말아 새우젓 무침하고 드셨다.

한바탕 애기들하고 지겨운 전쟁을 치른 후에 먹는 아침밥은 참 묘한 맛이다.


황혼육아는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렇다고 황혼육아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다.

황혼육아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면

1분이 됐던 10분이 됐던 한나절이 됐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으라고 하고 조언한다.


주중에 나는 매일 1시간 정도 누워서 음악을 듣는다.

방바닥에 등 붙이고 추는 막춤, 해보면 꽤 신난다.

무릎. 허리에 무리도 안 가고


주말에는 또 무조건 나간다. 

나 홀로 영화, 나 홀로 박물관, 나 홀로 방황 등등 그때 그때 다르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은 기어코 나간다. 날궃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라,


손주가 던져놓은 팬티를 꺼내니 10년 묵은 먼지가 가득,

세탁기에 넣으려고 베란다로 나갔는데 새삼스레 눈에 띄는 손주의 포스터

게으름 많이 피우는 나를 위해 붙여 놓은 손주표 포스트에 쓰인 글귀는

'할머니 공부 열심히 하세요'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구구단도 아직 서툰 녀석이

산전수전 다 겪어 구미호가 된 할머니를 가르치러 든다.

아직도 배울 게 있다 싶으니 그냥 즐겁다. 오늘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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