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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Jun 29. 2021

Who wants to live forever?

누가 영원히 살고싶어 할까?


새벽에 원고 쓰다가 딴짓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쓸쓸해서 그럴 거예요. 빚 설거지의 팍팍함이 밀려와서요. 애들이 어릴 때는 저 혼자만 용을 쓰는 게 억울해서 새벽 5시에 애들을 깨워 엄마가 쓴 원고를 읽어봐 달라 했었지요. 200자 원고지에 쓰지 않으면 글이 안 나올 거 같아 1990년대 중반에서야 컴퓨터로 원고를 썼는데요.. 그 이전에 200자 원고지에 글자를 욱여넣을 때 애들을 참 많이 닦달했습니다. 다큐멘터리 50분짜리 원고는 200자 원고지로 70매 정도였어요. 인서트와 음악 들어가고요. 중1짜리 딸은 엄마 닦달에 눈도 못 뜨고 일어나 원고지를 넘겼고, 저는 오타 말고 흐름을 보라고 날을 세웠습니다. 얼마나 빨리 갈겨썼는지 저도 제 글씨를 몰라보는데 엄마 서슬에 놀란 애는 그걸 다 읽고 “엄마 잘 된 거 같아” 했습니다. 오류를 짚어내라는 것이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살얼음판인 세상을 잘 건너가기 위해서요.      



제가 코털 버섯 같습니다. 습지에 터를 잡고 잠깐 살다 간. 그래서 지금은 혼자 견딥니다. 오늘도 삼십여 년 전처럼 불안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 이런 날은 <음악>에 저 잘하고 있냐고 묻고 저에게 답합니다. 오늘 새벽에 이어폰을 끼고 프레디 머큐리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열 번도 넘게 물어봤습니다.

Who wants to live forever?           


언젠가 새벽,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커피를 마시다 쏟았습니다. 제기럴~~ 오늘은 될 일도 안되려나~~ 원고를 쓰기 전에 정신을 모으기 위해 쏟아진 커피로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제가 한 마리 화사(花蛇)로 태어났습니다. 그날도 Who wants to live forever?  머큐리에게 물었지요.     


Who wants to live forever?     

There's no time for us

There’s no place for us

What is this thing that builds our dreams, yet slips away from us?

Who wants to live forever?

Who wants to live forever?

There's no chance for us

It's all decided for us

This world has only one sweet moment set aside for us


Who wants to live forever?

Who wants to live forever?

Who dares to love forever

When love must die?


But touch my tears with your lips

Touch my world with your fingertips

And we can have forever

And we can love forever

Forever is our today

Who wants to live forever?

Who wants to live forever?

Forever is our today

Who waits forever anyway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우리를 위한 장소가 없어요

우리의 꿈을 쌓아가면서도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해 남겨진 단 한 번의 달콤한 순간만을 가지고 있다.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누가 감히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언제 죽어야 하는가?


하지만 내 눈물을 입술로 만져봐

손가락 끝으로 내 세상을 만져봐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는 우리의 오늘이다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

영원히는 우리의 오늘이다

어쨌든 영원히 기다리는 사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일곱 번 봤습니다. 극장에서  이 노래를 듣으려고요. 파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라미 말렉 위로 쏟아지는 이 선율 때문에요. 세 번 이상 본 영화가 몇 개 있습니다. 국민학교 때 본 <저 하늘의 슬픔이>는 슬퍼서  그랬고요. 황정순 김희갑 주연의 <팔도강산>은 관객이 너무 꽉 차서 극장을 빠져나오지 못해 억지로 네 번 정도 본 거 같습니다. 1960년대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관객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좌석 배정을 하는 게 아니어서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였지요. 엄마 몰래 영화 보러 갔다가 어른들 틈에 끼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 <초록 물고기>와 이준익 감독 <사도>를 다섯 번 넘게 봤습니다. 각각 다른 사람을 극장에 데리고 가서요. 그리고 지금은 넷플릭스로 다시 찾아보고 있습니다.


새벽에 밀려왔던 쓸쓸함. 외로움을 어루만지니 지금은 좀 편안해졌습니다. 이 맛에 브런치를 들락거리는 거 같습니다. 고마워요. 브런치 덕분에 살아요.


지난해 늦가을에 만난 단풍입니다. 잊혀질까봐 찍어뒀습니다. 이제 또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에서 단풍이 내려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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