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작가 되기 (9)

시사(時事) 프로그램 원고는 계영배(戒盈杯)에 담아야

by 박길숙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지만 글은 새로워야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은 그날그날 일어나 사건과 새롭고 유익한 정보를 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일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습니다. 세상이 뒤바뀐 듯한 대형 사고가 발생해서 촌각을 다투는 상황도 되짚어 보면 예전 판박이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예전에 썼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쓰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표절입니다. 아주 위험한 일이지요.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적지 않은 분량의 원고를 쓰기란 쉽지 않습니다.


50분짜리 시사 프로그램 경우 대략 A4 용지 20매 (12포인트) 정도를 씁니다. 오프닝 A4 반장 정도, 뉴스 등 5장 정도, 출연자 패널 대담 원고 7장 정도, 고정 코너 원고 3장 정도, 고지(告知) 1장 정도, 중간 브리지 1장 정도, 클로징 반 정도로 리포터가 취재 해온 내용을 포함한 자료 취합. 파악 시간은 제외하고 순수 글쓰기 시간만 약 3시간 정도 걸립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오프닝부터 클로징까지 일사천리로 나가는데 이런 날 보다는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습니다. 온(ON) 에어 빨간 불이 들어오기 약 3시간 전에는 원고가 나와야 하는데 오프닝에서 막혀 버리면 정말 미치고 팔짝 뜁니다. 원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PD 생각에 온몸이 굳어집니다. 이럴 때 꼭 마(魔)가 낍니다. ‘약간의 변형을 통한 자기 표절’이라는 사고를 치게 되는데요. 시사 프로그램 작가에게 이건 섶을 지고 불 속을 뛰어드는 거와 다름없습니다. 오프닝, 브리지, 클로징 중 어느 부분에 야료를 부리든 간에 백발백중 들통이 납니다. PD가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쳐도 프로그램을 오래 한 엔지니어 눈에 걸리고 진행자도 단박에 눈치챕니다. 리포터와 성우도 대놓고 얘기는 안 하지만 긴가민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설마 예전에 읽었던 내용을 기억하겠어?” 했는데 이 설마가 사람을 잡습니다.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표절 한 당사자에게는 내색도 하지 않고 험담을 하는데 이게 피를 말리는 겁니다. PD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MC 리포터, 성우, 엔지니어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듭니다. 간이 콩알만 해진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거 같습니다. 이럴 때는 PD에게 빨리 사과하는 게 상책이고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드라마 작가는 신작 발표 때 기자가 전(前) 편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하자 “나는 자기 복제해도 괜찮다”라고 했답니다. 그 작가의 당당함과 자기 복제도 자랑이 되는 위상이 부러웠습니다. TV 미니시리즈나 TV 일일 드라마, 주말 연속극 등은 작가가 장르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때에 따라서는 자기 복제도 드라마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은 단언컨대 자기 표절 자기 복제는 절대 금지입니다.


한번 썼던 문구는 아무리 리폼을 잘한다고 해도 원단이 같으니 재고이지 새 제품은 아닙니다. 새롭지 않은 사건의 반복일지라도 시사 프로그램 작가는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표현을 써서 신선하게 전달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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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찍어서 보낸 지리산 겨울입니다. 라디오 작가를 계절로 표현하라면 겨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과의 경쟁


지난번에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지 말씀드렸습니다. 각 방송사는 라디오 청취자의 귀를 자사(自社)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높은 진행자를 모셔오고 출연자와 패널 또한 지명도가 높은 이들을 선점하기 위해 피를 말립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작가와 PD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먼저 좋은 패널을 모시기 위해 전화를 들고 동분서주합니다. 모든 시사 프로그램이 <그날 일어난 사건>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특별한 밥상을 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손맛이 좋은 요리사처럼 <그날 일어난 사건>에 여러 가지 요소를 적재적소에 버무려서 신속하면서도 맛있는 밥상을 내놓아 청취자의 만족도를 높여야 다음에도 또 찾아옵니다.


수많은 경쟁 프로그램에서 우위를 점하고 앞 뒤 프로그램까지 상생할 수 있게 하려면 1차 적으로 주재료인 <그날 일어난 사건>과 여러 가지 요소를 작가 자신의 걸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송 원고와 사건의 내용. 진행자의 결이 맞지 않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시사 프로그램 원고의 기본기


전에 오래가는 라디오 작가는 자기만의 특별한 문체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시사 프로그램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당대의 사건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인 만큼 정확한 정보 전달, 공정한 분석과 해설, 건강하고 현명한 여론 형성에 주안점을 두고 집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을 갖춰야 하는데요. 한소진 작가의 <방송대본 이렇게 써라>에서 언급된 내용에 제 생각을 보태서 3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청취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비유가 필요하다.

시사 프로그램은 딱딱하고 내용도 어렵습니다. 여론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건은 가닥을 잡기가 힘듭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적절한 비유와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 비유와 에피소드가 해당 사건과 맞는지 몇 번이고 곱씹어 본 다음에 적절하다는 확실한 판단이 섰을 때 인용해야 합니다. 주제와 겉도는 비유와 에피소드를 인용하면 MC는 딴 얘기를 합니다. 원고 내용이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시사 프로그램 원고를 쓸 때 실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가 고사성어, 속담, 널리 회자된 병법(兵法), 촌철살인의 시(詩) 등입니다.


2. 풍부한 자료는 시사 프로그램 원고의 보약이다.

모든 방송작가의 첫 번째 임무가 자료와의 싸움입니다. 얼마나 좋은 자료를 많이 취합해서 적절하게 활용했는가에 작가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료 수집을 잘하는 작가가 유능한 작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십은 자료가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검색 가능한 정보는 이미 낡았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에는 적합지 않은 자료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시사 프로그램 원고 자료를 옛날 신문과 옛 문헌, 관련 사건. 사안과 관련해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등을 통해 원고 자료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료를 많이 취합했다고 해서 이것저것 모두 원고에 담으면 큰일 납니다. 많은 자료에서 청취자가 격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뽑아낼 줄 알아야 하고, 그 자료에 작가의 새로운 시각을 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작가의 새로운 시각이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걸 말합니다. 어려운 걸 어렵게 말하는 건 쉽습니다.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게 가장 어려운 거 같습니다. 어려운 걸 쉽게 말하려면 자료가 많아야 한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결론이 선명하지 않으면 앞에 했던 모든 이야기가 맹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맞춘 내용으로 공정하게 결론을 맺으면 프로그램의 전문성과 퀄리티가 확보됩니다. 종종 청취자의 판단에 맡긴다는 멘트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애매한 포지션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청취자와 패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확하고 공정한 결론을 도출하려면 작가가 이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고 순발력과 정확한 판단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와 풍부한 자료 수집 능력, 최적의 패널을 마이크 앞에 앉히는 섭외 능력, 다양한 시민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질문지 뽑기, 능력 있는 리포터 활용 등은 시사 프로그램 작가의 기본기입니다.


시사 프로그램 원고는 계영배에 담아야 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지나침을 경계할 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을 쓰는데요. 시사 프로그램 원고도 마찬가집니다. 작가가 욕심을 부려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모두 담으면 주제와 방송 명분이 사라져 죽을 쑵니다. 저는 시사 프로그램 원고 계영배(戒盈杯)에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가득 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라는 뜻이 담긴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절주 배(節酒杯)’라고도 하는데요. 계영배에 70% 이상 술이 차면 술이 모두 새어나가 버리고 맙니다. 술을 마시려면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시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시사 프로그램 원고 이야기를 하고 보니 어쩐지 제 원고가 부끄럽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자기 원고는 별 게 없네”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질책 당연히 받겠습니다. “시사 프로그램 원고가 이렇게 생겼구나.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요. 문이 없으면 벽을 타고라고 올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디오 작가 되기>가 여러분의 벽 타기에 동아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첨부 파일에 원고와 큐시트 1개 올려놓겠습니다. 현재 국악 프로그램하고 있어 예전 시사 프로그램 원고 첨부합니다.


다음 회에는 시사 프로그램의 숙명이기도 한 번갯불에 콩 튀겨 먹어야 할 <속보 관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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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친구가 보내준 사진인데 그냥 묻어뒀습니다. 브런치에 어떤 사진을 올려야 좋아하실지 고르는데 이 사진이 눈에 띄네요. 돌을 품은 돌 석중석(石中石). 이렇게 제 심장에도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을 좀 많이 하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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