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그렇지만 시사 프로그램은 번갯불에 콩 튀겨 먹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대형 사고가 발생했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운명했을 때 급히 특별 편성을 합니다. 제작해 놓은 프로그램을 제쳐놓고 다시 큐시트 작성하고 패널 섭외하고 거기에 맞춰서 스톱워치 켜놓고 원고를 써야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던 2001년 3월 21일 생각이 나네요.
사무실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정주영 회장 타계 소식을 접했는데 사무실에 들어가니 당일 오후 9시 뉴스 끝나고 50분짜리 특집을 내보내야 한다면서 준비하라는 겁니다. 부랴부랴 사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음향. 영상 자료실을 뒤져 방송에 가장 적합한 정주영 회장 육성을 찾았습니다. 또 정주영 회장이 대한민국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현장의 소리도 모았습니다. 이날 고 정주영 회장 50분짜리 특집 방송은 사전 녹음 50%.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50% 진행했습니다. 1분 방송에 200자 원고지 2장이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분량입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PD를 중심으로 작가. 리포터 3명이 긴급 회동을 했고, 일사불란하게 각자 흩어졌습니다.
제가 작성한 질문지를 들고 세 분의 리포터가 전문가를 찾아가 <북한> <건설> <정치> 분야 인터뷰를 해왔고, 제가 25분짜리 정주영 세미 다큐멘터리 원고와 스튜디오 진행 원고를 쓰는 동안 PD는 스튜디오 출연자 섭외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정주영 방송을 하다 보니 명분과 이름 있는 패널은 품귀 상태!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동원해서 이명박 전 대통령 섭외에 성공했습니다.
정주영 회장 일대기를 다룬 사전 녹음 다큐멘터리는 리포터들의 준비된 취재력 덕분에 생방송 30분 전에 녹음을 마쳤습니다. 생방송 대본에 맞춰 녹음 테이프를 돌리면 끝. 마지막 남은 건 출연자들이 방송 시작 전 10분 전에만 도착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이 길이 막혀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의 생생한 일화를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듣는 것과 사전 취재를 해서 듣는 것과의 천지 차이고 중요한 내용을 소화해줄 출연자 펑크는 방송 사고와 다름없어 제작진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저는 본관 주차장에서 출연자를 태운 차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생방송 대본을 급히 변경해 출연자 대담을 뒤로 배치했습니다. 사전 녹음 분 고 정주영 회장 일대기를 내보는 시간에 출연자가 못 올 경우를 대비해 전화 인터뷰 섭외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사전 녹음 분 다큐멘터리가 끝나기 10분 전에 스튜디오 들어가 예정된 대담이 잘 이뤄졌습니다.
대통령 선거 당일의 긴박함
2021년 3월 9일이 20대 대통령 선거일이지요. 대통령 선거 투표가 진행되는 날은 속보가 연이어 터집니다. 정규 시사 프로그램은 일제히 생방송 체제로 전환돼서 작가들은 주요 당사 분위기 파악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투표율과 주요 후보의 동향. 투표와 관련해서 들어오는 사건 사고 소식을 분석해서 방송 여부를 결정하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확인을 거듭하면서 원고를 작성해 MC에게 전달합니다. 특히 대선은 그 어떤 사안보다 중대하기에 원고에 대한 부서장 결재도 철저합니다. PD와 작가, 리포터가 손발이 착착 맞아야지 어느 한 사람이 삐걱거리면 전체가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또 당선자가 확정되는 순간 TV 라디오 모두 당선자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데 이 또한 속보의 연속입니다.
저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 다큐멘터리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해서 과반 득표자인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지요. 그리고 한나라당은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으로 최다 득표자인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당시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후 차근차근 대권 재도전을 준비해오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 후보는 끊임없이 당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 후보에게 밀려 있었지요. 그러다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계기로 앞지르면서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 양강 구도로 굳혀졌습니다. 이렇게 양강 구도로 굳혀지면 작가 두 사람이 투입되어 1.2위를 다투는 후보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갑니다.
대선 직전 두 후보의 인간적인 삶, 정치철학과 신념, 대선 공약, 국제 정세 분석 등을 모두 담아서 두 후보의 다큐멘터리를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투표 결과만을 기다립니다.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도 실수 없이 당선 확정되는 순간을 준비해놓은 다큐멘터리에 담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각 후보의 당사에 나가 있는 리포터에게는 실시간 투표율 변화에 따른 질문지를 보내고, 서울역 등 주요 지점에 나가 있는 리포터에게는 다양한 질문 내용을 보냅니다. 인서트 편집할 시간이 없는 만큼 정확한 팩트가 전달되도록 초긴장을 하다 보면 털끝이 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선 확정 속보가 나오면 바로 얹어서 시민의 반응을 재빨리 담아 방송합니다. 이제 초겨울로 들어서면 20대 대선에 맞춰 시사 프로그램과 작가들이 번갯불에 콩 튀어 먹듯이 달릴 겁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20대 대통령 속보가 나오면 불이 난 라디오 작가의 발도 상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김정일 사망 소식
2011년 12월 19일 오전 9시 30분쯤 담당 시사 프로그램 원고를 PD 메일로 보내고 버스를 타고 방송국으로 가는데 기사분이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북한에 중대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 12시에 북한 노동당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속보가 나왔습니다. 순간 ‘김정일이 사망한 건가? 그럼 오늘 원고를 뒤엎고 다시 써야 할 텐데 오프닝은 어떻게 갈까? 출연자 섭외는 누구를 하지’ 이런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본능적으로 수첩을 꺼내 전문가 리스트를 훑어봤습니다. 북한에 김정일 사망이 아니더라도 중대 상황이 발생하면 전문가 섭외가 힘들 텐데 싶어 PD한테 전화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한 거 아닐까요?” 했더니 설마 하면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 빨리 오라고 전에 없이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 촉이 맞았습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고,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다가 12월 19일 정오에 특별방송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던 겁니다. 제가 맡은 프로그램이 낮 1시 5분부터 방송인데 12시에 김정일 사망 공식 발표를 들었으니 이건 번갯불에 콩을 튀겨 먹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담당 PD는 원고에 담을 속보를 날라다 주고, 저는 TV 3대로 KBS. 연합뉴스. YTN 속보를 보면서 대본을 썼습니다. PD가 출연자를 섭외하면 그에 맞춰 질문지를 뽑고 MC도 쪽 대본을 숙지하고 인터뷰 내용을 소화하느라 긴장감이 역력했습니다. 그날 제 프로그램 원고와 큐시트 첨부 파일로 올려놓을게요.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원고를 보여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보여드리는 이유는 라디오 작가를 꿈꾸는 분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라디오 원고 구경도 못해보고 덜컥 발을 들여놓고 허둥댔던 시절이 떠올라서요. 필력이 갖춰진 분이라면 포맷을 보면 금방 감을 잡거든요.
이렇게 써놓은 대본을 뒤엎고 속보를 내보냈던 게 제 경우 1994년 7월 4일 김일성 사망, 2006년 7월 5일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인데요. 촌각을 다투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서 작가는 순발력을 길러놔야 합니다.
라디오 작가는 스타가 아니라 스타 제조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라디오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이 있는데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어야 하고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또 출연자와 MC 리포터 엔지니어 등 모든 스텝과 공동체적 결속력이 필요하기에 성격도 원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밤샘 작업도 불사해야 하니 건강은 필수적이고요.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방송 현장에서 스스로 중심축이 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습니다.
껍질 눈물 버섯은 풀밭에서 많이 자라는가 봅니다. 눈물은 어디다 두고 껍질만 남았을까요? 풀잎이 무성한 걸 보니 눈물을 대신 머금은 모양입니다. 눈물을 먹고도 힘차게 들녘을 채우는 풀들의 도도함이 언제쯤 제 몸에도 깃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