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10분 너무 일찍 일어난 게 탈이다. 어제 느닷없이 강타한 돌풍과 폭우 때문에 잠을 설친 데다 비 온 끝이라 날이 습해서 다른 날보다 한 시간 가량 빨리 일어났다. 늘 그러하듯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는데 책상에 툭 떨어진 오래된 월간지 <주부생활> 1988년도 기사. 왜 기사만 따로 간직했을까?
사건 경위;
1982년 2월 5일 제주 국제공항 준공식과 제주도 연두 순시를 앞둔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성남공항에서 3대의 공군 수송기가 내려왔다. 가장 먼저 출동한 공군 수송기는 C123기. 특수전사령부 707대대 소속 특전사 대원 47명과 공군 6명이 탑승했다. 선발대인 이 공군 수송기는 목표지점인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1060m 고지 개미등 계곡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특전대원과 공군 53명이 전원 사망했다.
은폐;
대통령 경호 작전 ‘제주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수송기에 몸을 실은 이들은 죽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은폐되고, 숨겨졌다. 특전사 대원들을 태운 수송기가 추락하자, 나머지 2대의 수송기를 타고 온 특전사 대원들이 철통보안 속에 수색작업을 진행했다. 국방부는 사고 이틀 후인 7일 유가족에서 사망 사실을 알리고, 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치했다. 국방부는 유족들에게 전두환 대통령 경호 업무가 아닌 ‘대침투 훈련’ 중 사망이라고 알렸다.
1982년 2월 6일 저녁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한 'C123기 추락사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보도한 기사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군용기의 자세한 사고 원인은 조사 중"이며 "53명의 사망자 명단은 군 사정에 의해 발표하지 않고 유가족에게만 통보하기로 했다"라고 썼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군용기가 추락해 5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전두환 정권은 "조사 중"이라는 말로 무마하려고 한 것일까. 사망자 명단을 공개하지 못할 "군의 사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정부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했던 특전대원들의 죽음을 왜 '대침투 작전 훈련 중 사망'이라고 바꿔치기한 것인가. [2007년 오마이뉴스 장윤선·김도균 기자
사고 후 넉 달만인 6월 2일 정부는 “육군 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소속 승무원 6명 등 53명을 태우고 훈련지역인 제주도 해안에 도착, 착륙을 시도하던 중 갑자기 강한 북서풍에 의한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쪽 3.71km 지점에 추락, 전원 순직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82년 2월 5일 C123기 사고 뒤 특전사에서 세운 충혼비.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진실은; 주부생활 기사 발췌
사고를 당한 제 *** 사령부 내 707 특수임무 대대 소속, 약 3백5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이 대대는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의 경호를 위해서 1981년 3월 26일 창설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창설 멤버로 대통령 순시 시 경호 선발대 역을 맡았다. 사전에 현지에 파견되어 하수구 수색, 주요 건물 수색, 외곽 점검 등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인을 350명씩이나 차출하여 상설 경호부대를 만들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 경호를 맡고 있는 경호원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덥지가 않았던지.. 지금은 그 특수 임무 대대가 해체되고 없습니다. 제5공화국에만 특별히 필요했던 부대였던 것 같습니다" - 김운환 의원
컴퓨터로 보면 기사가 자세히 보여요
1982. 2.5 특수임무 대대원들은 성남 비행장으로 가서 수송기에 몸을 실었고 수송기는 낮 1시 30분경 목적지를 향해 이륙하였다. "그이는 말을 안 했지만 다른 대원들 중에는 자기 아내에게 무엇 때문에 가는 지를 밝히고 간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아내들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자기 남편이 대통령 경호를 위해 제주도로 떠났음을 짐작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긴 하지만 당시 특전 사령관이었던 박희도 준장이 자청해서 특수임무대 대원 전원을 출동시키겠다고 장담했다더군요. 특전사령관의 맹렬한 충성심과 그에 따른 과잉 경호로 내 남편이 죽었다 싶은 게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100일이 지나도록 방치된 시체들을 목격하다. 1982년 5월 15일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한 유족들은 군인들의 저지를 뿌리하고 이후 사고 현장을 찾았다. 군당국의 설명과 달리 현장에는 기체 잔해와 시신의 일부로 보이는 유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라산에 수차례 왔다. 현장에 가 보니 사고 현장의 뒤처리가 엉망이었다. 공군들이 수습처리 작업을 하면서 시신의 팔다리를 여기저기 묻어 놓았고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땅을 치며 울었고 하늘을 우러러 피를 토했습니다. 내 남편이 엄동설한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또 이렇게 뒹굴어야 하다니요"
"우리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니까 작업을 하고 있던 군인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황급히 뭘 깔고 앉으며 얼굴색이 변하는 거예요. 이것들이 또 뭔가를 감추고 있구나 생각하니 불끈 악이 바쳐서 확 달려들었습니다. 안 비키려고 하길래 '넌 형도 없고 아우도 없느냐'며 악을 바락바락 쓰며 밀쳐내니까 슬금슬금 피하더군요
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던 특전사 대원들. 이들은 그날 오후 3시 15분경 전원 사망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물 소 리 -박길숙
노자도 없이
빈 손으로
어디로 가나요
그대
가시는 길목
길 섶 위에
꽃은 피우지 마셔요
꽃으로는
덮을 수 없는
당신의 한 생애
그냥
젖어 흐르셔요
흐르다가 고단한 잠
몸을 뉘이고 싶거들랑
바람결에 흘러
흔적 없이 오세요
핏 발 선 눈으로
지하철 막차 타고 와도 좋아요
나
사는 이곳
마른풀 잎새 위에
새벽이슬로만 얹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