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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Jul 30. 2021

내 인생 화양연화

정수야 황혼육아를 떠 안겨서 고마워

기억하라.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유일한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가지고 있는 때이므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톨스토이-     




사위 정수와 나와의 인연이 올해로 13년째다.  정수는 내가 "김서방"이라 부르면 화 난 줄 알고 긴장한다,  그래서  "정수야 ~"라고 불러준다.  13년 전 정수는 불현듯 내게로 왔다. 내 딸이 서른두 살이던 해다. 어느 날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엄마가 보고 괜찮다고 하면 사귀겠다는 단서를 달고 한 번 만나보라 했다. 30이 넘도록 남자 사귈 생각은 전혀 안 했던 아이였다. 이유가 있다.   엄마가 엄마답지 못해 엄마를  챙겨야한다는 의무감이  딸을 짓눌러서  그런거다.


딸은 나 때문에, 아니 나의 나쁜 술버릇 때문에 고생 무지하게 많이 했다. 내가 방송 일을 처음 시작했던 1985년부터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방송 기획은 거의 술자리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술자리가 잦았다. 그 덕분에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술이 떡이 돼서 집에 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강부자, 황인용 선배님과 일하던 때인데 황인용 선배님 <밤을 잊을 그대에게>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배동 카페 골목으로 갔다. 그날은 통 큰 강부자 선배님이 쐈다. 술이 술을 마신다고 그날따라 술이 술술 잘 넘어갔다. PD가 우스개 소리로 “강 선배님이 센지 작가가 센 지 한번 보자”라고 했다. 깡도 세지. 그날 새벽 3시에 쫑 났는데 내가 이겼다. 이 소문은 금세 퍼졌다. 이튿날 K-본부 5층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강부자 씨를 술로 이겼다며? 대단해” 이랬고, “박 작가 소주 한잔 하자”는 말을 더 자주 들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젊었을 때 난 주사(酒邪)가 좀 심했다. 술이 어느 선까지 오르면 가방에 있는 걸 모두 꺼내 선심을 썼다. 휴대전화도 주고, 카드도 주고, 방송국 출입증도 주고, 심지어 주민등록증도 줬다. 술 마신 그 이튿날이면 M 본부 사람에게서 까지 연락이 왔다. 출입증 찾아가라. 인감도장 찾아가라고 (왜 도장을 싸들고 다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감)       


휴대전화는 버스에 하도 많이 두고 내려서 내 딸이 휴대전화 가져오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 나는 원고 쓰고, 딸은 내 전화에 전화해서 버스 종점에서 찾아오곤 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딸은 그 어린 게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찬 이슬 맞고  문 에서 서성였다. 나처럼 뻔뻔한 엄마는 둘도 없을 터!       


내가 술을 줄인 계기가 있다. 그날은 신도림역 부근에서 마셨는데 초장부터 취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다들 집에 간다는데 나만 안 간다고떼를 썼다고 한다. 책과 노트북이 든 무거운 백 팩을 짊어진 채 막무가내로 전봇대를 끌어안고 꿈쩍도 안하니, 부장이 딸한테 전화해서는 “엄마가 집에 안 간다고 막무가내니 네가 와서 데려가라”이랬단다. 그러자 내 딸 왈 “아저씨랑 술 마셨으니 아저씨가 책임지세요” 이랬다고. 부장은 “마누라가 아프고 아들은 내일 시험이고 그래서 우리 집에 데려갈 수 없다”라고 애원 반 읍소반 했다는 것. 어찌어찌해서 택시를 태워 보내 집에 왔는데 현관문을 열고 기어들어 가니 딸이 집에 들어오지 말고 밀어냈다. 펑펑 울면서.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주사(酒邪)가 무서워졌다. 그래서 소주 1병으로 확 줄였고 현재까지 유지 중이다.    

 

정수는 내가 술을 확 줄인 후에 만났다. 딸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제주 갈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통보 했고, 나는 “혜원이 한테도 남자 친구가 생겼다”며 엄마 동생들한테까지 미팅 장소 시간을 알려주며 자랑했다. 그랬더니 막내 동생이 “그런 자리 사람 볼 줄 모르는 언니 혼자 나가면 안 된다. 혜원이 큰일 난다”며 식구들을 총동원했다. 초면에 정수는 직계 가족인 나는 물론, 이모, 이모부, 외할머니에게 까지 인사를 드렸다.     

 

정수가 오기로 한 그날, 밖이 환히 보이는 통 유리창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혜원이에게 정수를 만나게 된 계기, 직업 등등을 물었다. 가족 모두 진지하게 앉아 결혼은 이런 사람하고 해야 한다는 등 훈수하는데 나만 들떠 있었다. 동생이 “언니 정수 오면 절대 웃지 마. 일어나서 왔다 갔다 하지도 말고”라며 단속했다. 내 귀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동생이 잔소리를 하는 사이 음식점 문이 열리고 갈치 색 정장을 입은 청년이 입장했다. 혜원이도 아직 정수를 못 봤는데 내가 먼저 보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네가 정수니?” 반색했다. 그날 엄마한테 동생한테 정말 많이 혼났다. 정수가 맘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나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정수는 그렇게 검색도 당하지 않고 단박에 우리 팀원이 됐고, 혜원이가 청첩장을 줘서 결혼 날도 알았다. 결혼식 날 이틀 전까지도 딸이 “엄마 안동 결혼식장에 꼭 와야 해” 신신당부했다. 한 번도 졸업식 입학식을 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아들은 중1 때 학부모 총회의가 있대서 맘먹고 갔는데 내가 다른 중학교로 가서 아들을 찾아 애들이 엄마가 조기 치매가 온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일 때문이었다는 말은 너무나 이기적인 핑계. 나는 찾아보기 힘든 못된 엄마, 나쁜 엄마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 신경을 안(?) 쓰니 딸은 모든 일을 외할머니와 막내 이모하고 상의했고 살 집도 “엄마가 철이 없으니 네가 들어와서 살아야 한다”라고 결정이 났다. 나중에 정수가 "혜원씨가 어머니하고 같이 안 살면 결혼 안한댔어요"라고 털어놨다. 나하고 같이 살기로 결정났다고 하니 너무 편했다. 이불도 우리가 덮던 이불 주면 되고 그릇 안 사도 되고 참 좋다했다. 동생이 신혼부부 이불은 사야 한대서 신혼여행 간 사이에 이불 장만했다. 그때는 아무 말 안 하던 딸이 엄마 너무했다고 두고두고 타박이다.      


내게 신세계를 선물한 은서는 1호 혼수품이다. 딸은 입덧을 너무 많이 해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함께 사는데 정수가 부드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갈치 색 정장을 입고 홀연히 눈이 부시게 나타났을 때와는 180도로 달랐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 혜원이한테 정수 목소리 크다고 짜증 냈더니 안동 사람들 목소리 다 크다고 편든다. 전주 사람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처음에는 정수가 무슨 얘기만 하면 “정수야. 너 나하고 싸우자는 거냐?” 따졌다. 그럴 때마다 정수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했고 나는 대든다고 따졌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서 혜원이가 고생이었다. 그런데 이 갈등이 결혼한 지 7개월 여만에 종식됐다. 은서 덕분이다.      


이 꼬마들이 커서 지금 13살. 11살이다. 은서.은준


2.7kg짜리 은서가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다. 남매를 키웠음에도 미처 몰랐다. 온몸, 온 마음이 은서한테 향했다. 산후조리원에서 글 쓰고 산후조리원에서 출근하고 산후조리원으로 퇴근했다. 은서가 태어나니 글도 더 잘 나왔고 내 발걸음은 거의 우사인 볼트 수준이 됐다. 딸이 나중에 산후조리원 동기들이 “혜원 씨 엄마는 날아다니는 거 같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해서 쫌 민폐다”라고 하는데 맞다 싶었다.      




이렇게 훅 황혼육아를 맡겨준 정수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 얼마 전에는 위급한 사람을 심폐소생술로 살려내 표창장도 받았다. 황혼육아와 사위 자랑은 틈 날 때마다 해 볼 생각이다. 나는 구제 불능 팔불출이므로.

올봄 지리산 풍광이다. 내가 못가면 친구가 사진으로 <지리산의 봄>을 보내준다. 내 인생이 아리고 저리긴 해도 화양연화다. 잊지 않고 기쁨이 때 맞춰 피어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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