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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Aug 19. 2021

이명희 이야기 (4)

우박에 혼쭐이 나고도 고맙다는 내 동생

우리 속담에 “서울 사람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는 말이 있다. 서울 사람이 농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농부가 일 년 내내 모내기만 하는 줄 알고 비만 오면 풍년이라고 하니 농부가 보기엔 속 터지는 소리다. 명희를 보면 농사짓는 일은 하루하루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아니 매 순간 그래야 한다. 구름 흘러가는 방향이 조금만 달라도 바람 끝이 조금만 예사롭지 않아도 비가 올라나 바람이 불라나 하늘의 뜻을 가늠하느라 애를 쓴다. 가끔 명희 같은 농사꾼이 농사를 못 짓겠다고 작파하고 도시에서 살겠다고 나온다면 나라 살림이 어찌 될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동생이 농사 좀 짓는다고 나라 살림까지 들먹거린다고 핀잔할지 모르겠다. 나라를 큰 살림이라고 한다면 기초 살림은 들과 산 바다를 가꾸는 농사꾼이 하는 거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금방 허물어진다. 나라 살림도 그렇다. 명희 같은 농사꾼이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잘 살아야지 농촌이 살고, 면(面)과 군(郡)이 살고 도시도 번창한다. 그런데 명희를 통해서 기초 살림을 하는 농사꾼의 하루를 보면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두 손 두 발 다 들 것 같다. 성격이 진득하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으면서 바라는 게 많은 나로서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쉽게 지치고 실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제 명희한테서 카톡이 왔다. 오후에 갑자기 소나기와 우박이 쏟아져서 고추가 멍이 들고 팥밭이 소금에 절인 듯 풀이 죽었다고,


우박 사진과 함께 속상한 마음을 적어 보냈는데 우박 사진만 보고 예쁘다는 감탄사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읽어보니 우박이 오지게 내려 팥밭이 상처를 입었단다. 내가 바로 “서울 사람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는 속담의 주인공인 셈. 미안한 마음에 위로했더니 “하늘이 하는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지”라고 한다. 씨 뿌려 싹을 틔우고 튼튼하게 잘 키워 곧 있으면 팥이 열릴 텐데 누워 자빠졌으니 명희 속이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라고 한다. 이 말에 울컥했다.  하늘의 뜻에 두 말 없이 순응하는 명희 마음이 이 땅 모든 농사꾼 정신이다.      



우리 속담에 “넘어도 안 가본 고개에 한숨부터 쉰다”는 말이 있다. 해보지도 않고 겁을 낼 때 쓰는 말이다. 나는 안 가본 고개가 있으면 한숨부터 쉬는데 명희는 그 어떤 고개가 앞에 닥쳐도 할 수 있다고 밀고 나가고 해 보고 안 되면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포기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니 순응하고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도전의 의미다. 

동그랗게 제 몸을 웅크린 고추를 보고 OK 하는 것 같다는 명희의 밝은 눈이 참 좋다. 이런 명희를 보면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순리에 맞춰 참살이를 하는 이 땅의 모든 농사꾼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쌀 한 톨 밥상에 올리는데 여든여덟 번 손이 간다고 해서 여덟 팔자 두 개가 모여 쌀 미(米)가 되었다는 내력을 이야기하기는 쉽다. 하지만 여든여덟 번 손이 가는 동안 우박과 태풍 폭우 가뭄이 농부의 손을 무력하게 만들기 일쑤다. 밥이 하늘이라는 말은 ‘밥은 공평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에 농부를 받들라는 말을 보태고 싶다. 땅을 바르게 지키고 사는 명희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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